잠에 취해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베개 옆을 더듬거리자 곧 손 끝에서부터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전화를 거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다. 밝은 화면에 눈을 찌푸리며 발신자를 확인하니, 역시나 초였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니 '자고 있었냐?' 하는 물음이 왔다. 초의 하루는 길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초는 눈을 감지 않으며 대부분의 새벽을 고요하게 홀로 보내곤 한다.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망설이는 정적이 흐르고 마저 자라는 아쉬운 목소리가 하려던 말을 삼킨 듯 먹먹하게 들려온다. 그러면 약과 잠에 취한 나는 모른 척 전화를 끊을까, 수면을 포기하고 그녀의 넋두리를 들을까 고민하게 된다. 결국은 늘 물을 몇 모금 마셔 잠을 물린 후 초의 얘기를 듣는 것을 택하게 된다. 홀로 보내는 새벽의 시림을 아는 내가 초를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다. 내 팔자도 꽤나 기구하다고 생각하지만 초는 보고 있으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초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그런 시련들이 오히려 초의 오기를 자극시키는 것 같았다. 초가 유약해지는 시간은 오직 혼자 남겨지는 새벽뿐이다.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투기로 버티는 하루가 저물 때면 초는 기진맥진한 몸을 술과 담배로 채워 넣었다. 초의 밤은 티브이 속의 목소리, 시끄러운 음악 소리, 태블릿의 말소리가 한 데 뒤엉켜 알아듣기 힘든 소음이 가득했고 그럼에도 공허한 울분이 차오를 때면 초는 숨죽여 오열하곤 했다.
초와 나는 평생의 반을 알고 지냈다. 우리는 닮은 점이 아주 많아 서로를 운명공동체라 부르곤 했다. 기저에 깔린 음울함과 갈 곳을 잃은 분노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었다. 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덩달아 바짝 긴장해야 했다. 그건 곧 나에게도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는 암시였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불행은 늘 비슷한 시기에 찾아왔고 우리는 서로의 비참함을 위로 삼아 눈물 섞인 실소로 고통을 풀어냈다. 나는 슬프면 웃었고 초는 슬프면 화를 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도 벅차 우리는 외면하기 위해 발악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 곧 죽어도 지는 걸 용납 못하는 초와 가벼운 동정을 혐오하는 나는 밤새도록 술잔과 휴대폰을 번갈아 잡으며 새까만 마음을 삼켰다.
대화 주제는 한결같았고 몇 번을 곱씹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일상의 일부였다.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연거푸 너뿐이라는 말을 약속처럼 뱉어냈다. 우리는 우리가 제일 불쌍해서 자꾸 죽으려고 했고, 그러면서도 죽지 말아 달라는 모순적인 애원을 반복했다. 초와 시선이 맞닿을 때면 동공 안에 일렁이는 감정의 잔해가 선명히 보였다. 몇 번이나 넘쳐흐르며 생긴 생채기도 보이는 듯했다. 우리의 파도가 충돌하기 직전에 나는 초를 가만히 안았고 초는 잠시 어깨를 들썩거리다 수동적인 호흡을 뱉어냈다. 소리 없는 발작 같은 위로가 오고 갔다.
이번에도 초는 이미 들어본 이야기를 마치 처음 들려주듯 격양된 목소리로 뱉어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응응... 볼 수도 없는 고개를 끄덕이며 초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중간중간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와 꿀꺽이며 술이 목울대를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초와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에 맞춰 담배를 물고 물을 삼켰다.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같은 운명을 공유하기에, 초가 잠들지 못해 걸었던 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악몽으로 잠을 설쳤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확인을 받으려는 듯 "너는 알지?"하고 묻는 말에 "나는 알지."라고 답을 하니 초는 만족스러운 듯 그렇지, 그렇지 하며 작게 웃었다. 초의 새벽에 웃음이 한 줌 묻어 마음이 조금 놓였고 초를 힘들게 한 새벽은 그렇게 스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