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꽁꽁꽁

따뜻해야 하는 가장 추운 지금

by gloomee

일 년의 끝은 시린 바람과 함께 온다. 손끝, 코끝, 발끝이 시려지며 올해를 마무리를 할 때가 되었다는 알람이 울린다. 손이 얼어 핸드폰을 두드리는 속도가 느려지면 반년 동안 옷장 속에 박아둔 무거운 옷들을 꺼내고 두꺼운 이불을 탈탈 털어 침대 위에 고이 모셔놓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추위 방어를 시작한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기운이 마음에 드는지, 고양이들은 바닥에 누워 몸의 이곳저곳을 비벼댄다.


연말이 되면 곧 어른이 된다며 들떴던 기억이 아직 선명한데 이제는 코 앞으로 다가온 내년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우울해진다. 늘어난 나이, 늘어난 주름, 늘어난 책임감, 그리고 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음에도 나 자신이 한없이 어리게만 느껴져 내가 짊어져야 할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 채 자라지 못한 내가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는 꼴은 꽤나 우습다. 마음을 훑는 감정을 외면하고 의연하게 말을 이어가는 것도,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약으로 움켜쥐고 업무를 처리하는 것도 나잇값을 하기 위한 관성적인 행동일 뿐이다. 익숙해질 법도 한 일상을 보내는 나는 명치끝에 걸려있는 무언가를 억지로 누르고 있는 기분으로 이 특별하고도 평범한 시기를 마주한다.


어릴 적에는 이맘때 쯤이 되면 화려하고 분주한 분위기가 세상을 가득 채운 것 같았는데 다 같이 늙어가는 건지 지금 내가 겪는 연말은 꽤나 삭막한 기운이 돈다. 나이가 들수록 특별한 날이 없어진다는 말을 이해하면서부터는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날도 유난처럼 보일까 눈치를 보게 된다. 그저 일주일 중 휴일이 하루 추가된다는 사실만을 기뻐할 수 있다. 일 년의 끝자락에는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느라 소원해졌던 이들에게서 조금은 조급한 연락이 온다. 그 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은근한 사과를 담은 만남 제안이 들어오면 나 또한 뜨끔한 기분으로 부랴부랴 캘린더를 확인한다. 의무처럼 잡은 약속들이 캘린더를 빼곡히 채우다 보면 기대감 같은 것이 아니라 소모하게 될 체력과 돈에 대한 걱정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이런 기분으로 새해를 맞이하면 일 년을 우울하게 보내게 될 것 같은 노파심에 얼른 주방으로 가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달큼한 핫초코를 만든다. 몇 번 쓰지 않고 처박아둔 메모장을 꺼내 휴대폰의 사진첩을 쭉 살펴보며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적어본다. 굳이 미화하고 싶진 않아서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을 번갈아 적어 내려간다. 빈 종이 두 장을 꽉 채우고 나니 그래도 텅 빈 한 해를 보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나아진다. 연말과 연초에 특히 가라앉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잘 보이는 곳에 메모를 붙여두고 미지근하게 식은 핫초코를 마저 비워낸다. 누군가 무심코 건넨 따뜻한 연말을 보내라는 말을 어찌저찌 지키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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