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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은 Jan 11. 2019

‘자기만의 방’을 찾아서

3-2. 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엄마가 되고 회사를 그만둔 후, 때때로 남편은 나의 자유 시간을 위해 두 아이를 혼자 돌보았다. 그 금쪽같은 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돌아오면 왠지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이 사회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오로지 소비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함이 밀려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시간이 생기면 노트북부터 주섬주섬 챙기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내게 유일한 해방은 글 쓰는 일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집중을 하는 순간의 희열,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순간 느끼는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카타르시스였다. 다양한 매체에 외고를 쓰거나 새롭게 시작한 회사 일을 하는 등 글의 종류와 목적은 다양했지만, 주로 엄마가 된 후 바뀐 삶과 그에 대한 문제의식, 해법에 대해 고민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현재 최대 관심사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현재 좌표를 명료하게 인지해서 삶을 객관화하고픈 본능이 작용해서였다. 생각을 가다듬으며 삶의 방식, 이유, 목적에 대해 정리하고 나면 많은 것이 분명해지면서 충족감이 차올랐다.


문제는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리적 요건들이었다. 글을 쓸 때는 30분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딱 30분 어치의 글을 써낼 수가 없다. 지난 글을 더듬어보고, 맥락을 다시 정돈하고, 호흡을 맞추어 다시 글을 이어가려면 예열의 시간이 요구된다. 몇 단락의 글이라도 새롭게 써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1시간 이상의 집중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엄마들에게 그렇게 통째로 시간이 주어지는 기회는 드물다. 특히 두 아이 모두를 보육 기관에 보내지 않던 때, 나는 그야말로 24시간 육아에 매달렸다. 글을 쓸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다.


해법은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과 새벽 시간에 깨어 있는 것뿐이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 시간은 오롯한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였다. 아이들을 재우면서 비몽사몽해진 정신을 가다듬어 책상 앞에 앉을 때도 있었지만, 밤을 새다시피 한 날은 다음 날 아이들을 잘 돌보기 힘들었다. 때로 피곤해서 도중에 일어나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늦게까지 잠들어버리는 때는, 머릿속을 맴도는 상념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날아가버린 듯해 공허한 기분에 휩싸였다. 제대로 쓸 수도,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퇴사를 했지만, 동시에 내 일에 몰입하고 싶은 욕구도 점점 더 커져갔다. 이 모순은 나의 숙제였다. 일과 육아를 모두 잘 해낼 수 없는 이 사회의 현실 속에서 일을 그만두고 아이들을 돌보기로 한 이상, 내게 요구되는 제1의 의무란 가사와 육아 등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형적인 역할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기능적 관점에서, 나의 글쓰기는 주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내게 주어진 역할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남편은 나의 글쓰기를 응원한다고 말했지만, 내가 글에 몰두할수록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소홀해지는 데 대한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누구도 내게 글을 쓰는 대신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데 전념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글 생각을 하다가 놓쳐버린 가사와 육아의 공백에 스며드는 죄책감은 내 몫이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나의 글쓰기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누리는 고고한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되곤 했다. 내 편은 없는 듯했다.


외벌이로 가정 경제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남편의 무게감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글쓰기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증명하려 들기 시작했다. 적은 액수라도 원고료가 들어오면 꼬박꼬박 일러주었고, 금전적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쓰는 글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함구했다. 만약 남성이 전업 혹은 프리랜서 작가라는 직업을 가졌다면 나의 입장과 같았을까?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3인 이상의 가정 모델에서 남성의 사회적 노동은 당연한 기본 값이지만, 여성에게는 가사와 육아가 기본 값이다. 통계청에서 5년마다 실시하는 생활시간조사는 2014년 맞벌이 부부 중 여성이 하루 3시간 13분씩 가사 노동을 하는 동안 남성은 고작 41분씩 일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똑같이 사회적 노동을 하는데도 여성은 집안일을 거의 도맡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여성에게는 집안일을 완수해야만 사회적 노동을 할 자격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에 실시될 조사에서 얼마나 더 나은 결과가 나올까. 회의적이다.



이미 가부장제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버린 나는, 여성이 이 거대한 틀 안에서 자신의 일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역설했던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렸다. 그는 1928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여성 칼리지인 거튼(Girton)과 뉴넘(Newnham)에서 ‘여성과 픽션’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렇게 말문을 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울프가 이야기한 ‘돈’과 ‘방’은 인류의 역사 이래 시종일관 여성을 짓눌러온 성차별과 억압의 실체이며 상징이다. 여성은 오랫동안 기득권을 가진 남성으로부터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힌 채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했고, 집안에 갇힌 채 ‘그림자 노동(Shadow work)’에만 매진해야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만 머물러야 했지만 자기만의 공간은 가질 수 없었고, 쉬지 않고 일해야 했지만 경제적 보상은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들의 삶. 생활인으로 생존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돈 500파운드, 사유로 빚어낸 글을 종이 위에 옮겨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작은 공간은 그래서 여성의 인류사적 불평등을 응축해 건져낸 상징이다.


그의 강연을 재구성한 책 《자기만의 방》은 여성의 지위가 지금보다도 한 없이 보잘 것 없던 20세기에 쓰였다. “글쓰기에 놀라운 자질을 가진 여성조차 책을 쓰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더욱이 정신이 분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여성의 글쓰기에 대해 막연한 적대감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그의 통찰이다. 그 시대를 여성으로서 살아내며 굳건히 글을 써온 투지는 경이로울 정도이며, 동시에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당시 시대 분위기를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다.



그가 돈과 방을 논하던 때로부터 90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과연 얼마나 진보했을까. 여성이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사색과 집중에 필요한 물질적 자유,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는 그의 통찰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낯선 이야기가 되었을까. 여성을 옥죄는 수많은 겹겹의 장벽들은 지금 얼마나 걷어내졌을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찾아 전전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각, 새벽 1시 45분. 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번잡한 집안을 치우고 아이들 먹일 요리를 해야 한다. 이 집안에서 유일한 나의 방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깊고 조용한 밤뿐이다. 또한 이 글을 모아 책을 내게 되었을 때,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인 최소한의 금전적 대가를 꿈꾼다.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나는 또 여전히 내 글쓰기의 경제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쓰면서 100년 후쯤 되면 여성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사라지고 완전한 남녀평등의 시대가 올 것을 기대했다. 그가 제시한 마감 시한은 불과 10년밖에 남지 않았다. 진보의 발걸음은 예상보다 훨씬 더디고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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