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고은 Jan 18. 2019

소외된 자의 낮은 눈높이로 쓰다

3-3. 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이때만큼 긴장했던 기억을 또 찾기 힘들다. 친정에 가야 해서 혼자서 5살, 3살 두 아이를 데리고 KTX에 타야했던 때다. 가뜩이나 ‘맘충(Mom과 蟲의 합성어)’, ‘노키즈존(No Kids Zone)’이 논란인 시대, 조용한 기차에 두 아이를 데리고 탄다는 것은 그야말로 긴장되는 일이었다.


엄마와 딱 붙어 있으려는 아이 둘을 동시에 돌보려면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가족석이 필요했다. 아쉽게도 유아동반차량의 가족석은 일찌감치 마감이었다. 잠이 와 칭얼댈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기차를 타는 내내 낮잠을 잘까 싶어, 오후 2시 이후 기차 중에서 비어 있는 가족석을 예매하는 모험을 했다. 다행히 가는 기차에서는 두 아이 다 낮잠에 빠져들었다. 자는 아이들을 깨워 기차에서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평화롭고 고요한 2시간의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잠들 기미가 안 보였다. 다행히 가방에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퍼즐, 동화책 등 각종 놀 거리와 간식을 미어터지도록 담아 왔다. 덕분인지 서울로 가는 2시간 내내 아이들은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얌전하게 있어주었다. 대신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 놀이와 간식에 집중했다. 울거나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주변 승객들은 간간이 “아이들이 예쁘다”, “착하게 잘 논다”며 인사를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기적은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5분에 한 번씩은 주의를 준 덕분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큰 소리 내면 안 돼.” “공공장소에서 이야기할 때는 작은 소리로 말해야 해.” “의자 위에 일어서면 안 돼.” 아이들은 엄마가 주의를 주더라도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수시로 상기시켜줘야 했다. 그렇게 소란 없이 여행을 마치게 되어 다행이다 싶을 때쯤,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역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슬슬 내리려는 찰나, 한 젊은 청년이 아이들과 내 앞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기차에서는 아이들 좀 조용히 시키셔야죠!”


나는 그렇게 졸지에 ‘노키즈존’이 된 열차에서 ‘맘충’ 취급을 받으며 욕을 먹는 씁쓸한 경험을 맛봤다. 그 청년은 우리를 기습 공격한 후 조금은 멋쩍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황급히 나가버렸는데, 나는 경황이 없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순간적으로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 치는 흉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싫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수치스러운 기분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괴롭다. 나와 아이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불쾌함.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억압감. 저항하기 힘든 상대를 손쉽게 짓밟는 이로부터 느끼는 열패감. 아이를 동반한 엄마를 혐오하는 세태의 심각성은 미디어를 통해서만 보아왔지, 그게 내 일이 될 것이라는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혐오의 시선을 처음 경험하고 나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불특정다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지 몰라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세상을 향한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마음이 내 안에 똬리를 틀었다. 초기에는 공공장소라면 어디를 가든 아이들을 단속하기 바빴다. 그러다 점점 아이들을 위한 공간만을 찾아다니게 되었고, 그것도 일상이 되자 나중엔 어른 위주의 공간에는 되도록 외출을 삼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많은 실내에서 잠시라도 아이들이 뛰거나 큰 소리를 내면 누가 손가락질을 할까봐, 와서 항의를 할까봐, 누군가가 ‘맘충’이라는 제목을 달아 이름 모를 웹사이트에 글을 올릴까봐 움츠러들었다. 급기야는 대한민국 전체가 ‘노키즈존’이 된 것만 같은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것 같았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라면 사회가 정한 ‘정상 성인’을 기준으로 하는 외출은 포기한 채 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맘충’이라는 단어를 접한 지 불과 수년 만의 변화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혐오의 용어는 당사자를 겁박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사회적 혐오가 존재한다고 여기면 누구나 ‘나 역시 공격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규제 방안 연구를 진행 중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맘충’과 ‘노키즈존’ 현상을 다룬 2018년 9월 8일 자 한국일보 기사에서 “다수의 여성은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위협을 느끼고 지나치게 활동이 위축되며, 아이와 엄마는 확실히 이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심리적 불이익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혐오의 정서가 도처에서 폭발하는 시대, 세상이 칭송해 마지않던 모성마저 여성혐오의 하위분류로 편입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수많은 엄마들이 세상 밖에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가 되기 이전을 돌이켜본다. 내 존재 자체만으로 타인에게 부정당한 기억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인정과 응원을 받은 기억이 훨씬 많다. 우리 부모님은 먹고 사느라 바쁘셨던 평범한 분들이었지만 늘 삶을 낙관했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다”는 주변의 성원에 힘입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일에 몰두하며 살 수 있었다. 학교나 사회에서는 노력하는 만큼 성취를 이루는, 비교적 공정한 환경을 경험했다. 덮어놓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부정적으로 대하는 일을 겪어본 일도 지켜본 일도 거의 없다. 물론 지금은 내가 운이 좋았던 덕분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줄곧 세상을 긍정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서른여덟 해의 인생 가운데 엄마로 살아온 지난 6년이란 시간동안, 내 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뾰족하게 바뀔 정도로 극도의 김장감이 피어올랐다. 엄마가 되는 일이 이토록 희비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일임을 알았다면, 나는 과연 처음처럼 아무런 고민 없이 엄마가 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의 변화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 아이들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갓난아이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귀신같이 구분한다. 어린이집 통학차량에서 아이가 숨지는 사고를 방지하는 법안 하나 제때 만들지 못하면서, 정부와 정치인이 출산율 제고와 국가 성장을 논하는 이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자라는 내내 겪은 어두운 소외감이 겹겹이 쌓여 어른이 되었을 때, 과연 아이들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까.



내게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전에는 체감하지 못했던 소외와 배제, 차별과 억압의 경험을 쌓는 일과도 같았다. 세상은 미혼의 젊은 여성인 내게는 친절한 편이었지만, 엄마가 된 30대 중반 여성인 내게는 꽤나 불친절했다. 아이와 함께 다니지 않는 여성일 때의 나는 이 사회에서 적어도 이류 시민 정도는 되었지만, 아이와 함께 다니는 엄마인 나는 늘 민폐를 끼치는 삼류 시민 취급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기자로서 아이와 함께 세상에 나가면 ‘일도 하고 육아도 하는 워킹맘’으로 칭찬받았지만, 무명의 엄마로서 아이를 동반하면 ‘남편이 벌어준 돈으로 무전취식하는 무능한 아줌마’로 천대받았다.


나의 존재는 그대로인데, 외피가 바뀌자 세상은 나를 다르게 대했다. 차별은 이미 구조적으로 면밀하게 설계되어 있는 사회 질서에 따라 작동했다. 내가 어떤 계층, 어떤 층위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세상이 나를 대하는 운영체제가 자동으로 바뀌었다. 이런 경험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다른 존재, 다른 계층, 다른 집단의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하게 만들었다. 누구나에게 조금씩은 존재하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보는 일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좁은 시각으로, 얼마나 굳은 자세로, 얼마나 뻣뻣한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던가.


소중한 아이들을 만나게 된 일을 제외하고, 엄마가 되면서 내가 얻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이 소외의 경험이다. 이 경험들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입장에 서보는 상상을 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살았을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몰랐을 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부터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절실함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전 09화 ‘자기만의 방’을 찾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