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고은 Jan 25. 2019

간절함에서 꽃피다

3-4. 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19세기 영국 시인 코벤트리 팻모어는 1854년 장편시 《가정의 천사(The angel in the house)》라는 시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에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성을 이상적 모델로 제시했다. 남성의 눈으로 바라본 ‘가정의 천사’가 수호하는 집은 편안한 안식과 아름다운 평화가 가득한 공간이었겠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그런 기대는 자신을 옭아매는 굴레이자 감옥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1931년 《여성을 위한 직업(Professions for Women)》에서 오랫동안 여성을 구속해온 ‘가정의 천사’를 죽여야 한다고 비판했다. 여성이 아니라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20세기 이전 여성들에게 기대되었던 이상적 여성상은 21세기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파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사회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에게는 사회적 노동을 이어가며 일과 가정을 동시에 지켜야 하는 이중의 의무로 고통이 가중되었다. 혹은 강화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남편에게 경제적 부양 의무를 온전히 이양한 채, 자신이 이룬 사회적 성취를 버리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가정 내 성별 분업을 선택해야 했다. 형식적으로나마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을지언정 삶과 생활의 민주화, 젠더의 민주화는 더욱 요원해진 시대다.


역할의 감옥은 현대 사회의 자본주의와 도시화의 영향 아래 더욱 개인을 고립시켰다. 가정에 갇힌 여성은 고층 아파트 내의 바로 옆집에 사는 여성을 만날 기회조차 잃었다. 각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철저히 사회적으로 봉쇄되었다. 여성의, 엄마의 역할은 그저 사적인 영역에서 이뤄지는 시시껄렁한 신세한탄거리로 치부되었을 뿐, 공적인 무대에서 논의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못되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여성의 삶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받기도 했지만, 사회에 나간 여성들에게는 남성 중심적으로 짜인 오래된 질서 속에서 그저 살아남는 일만이 절실했다. 그 안에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남성의 질서로부터 도태되고 배제되는 일이었기에, 공공의 영역에서 여성의 삶은 더욱 소외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반복됐다.



이런 현대 여성을 구원하기 시작한 것은 “여성을 해방하겠다”고 앞장선 어느 영웅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스마트폰과 페이스북으로 상징되는 온라인의 연결된, 열린 공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그가 여성의 삶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결과적으로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 시대 여성들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만들어줬다. 가정 안에 갇힌 채 물리적으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들이 가상의 세계를 통해 바깥세상으로 통하게 된 셈이다.


세상을 향한 문을 열어젖히면 문고리를 쥔 채 문 앞을 서성이는 다른 여성들을 찾을 수 있다. 서로 말을 걸고, 화답하던 이들은 차츰 밖으로 걸어 나왔고, 만나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에게도 나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공명하고, 바로 옆집에 사는 이와도 공감의 전율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했다. 우리는 또 다른 나 자신임을, 이 사회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임을 깨달았다.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일들은 결코 사적인 일이 아니며, 사회의 거대한 구조와 질서 속에서 작동하는 공적인 의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된 것은 회사를 그만 두고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깨달은 무렵부터다. 나는 애타게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내가 겪고 있는 혼란과 뿌리 뽑힌 정체성의 실체,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닥치는 대로 읽고, 사고의 줄기를 찾았다 싶으면 그 뿌리를 파내는 심정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다 나름대로 생각이 정돈되면 글로 옮기는 일을 반복했다. 삶의 방황, 생활의 혼란에서 출발한 질문의 해답은 결국 페미니즘으로부터 찾았던 것이다. 그 도구는 결국 단 한 가지, 쓰고 읽는 글이었다.



글을 쓸 때 경험하는 몰입의 쾌감은 굉장했다. 머릿속을 간질이는 생각들을 머금고만 있다가 글로 풀어내고 나면, 진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그 자리가 내면의 충족감으로 채워졌다. 혼돈은 질서가 되고 나는 안정을 찾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가정의 천사’가 되기를 기대 받는 현실 속에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리적 시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궁하면 통한다’는 명제를 경험을 통해 스스로 증명했다.


낮 시간에 아이들을 돌보다가도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적어뒀다. 조금 더 나아간 정돈된 이야기나 에피소드는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에 기록했다. 여러 상념들이 모이고 모여 긴 호흡의 글을 쓰고 싶어지면 새벽녘에 노트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썼다. 그러다 아이들이 잠결에 엄마를 찾으면, 아이들을 다시 재우고 침대 한 구석에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쪼그려 누워 모바일에서 글쓰기 서비스를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했다. 퇴고와 윤문 등 반복해 새롭게 읽는 작업이 필요할 때면 PC와 모바일이라는 여러 기기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오히려 무척 유용하게 느껴졌다.


해리포터를 쓴 조앤 K. 롤링도 아이를 키우며 밤 시간에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의 애타는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신이 있다면,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 시간을 쪼개 글을 쓰는 간절함을 가진 이에게 상상 이상으로 초인적인 집중력을 선물해주었을 것이다. 통째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환경에서 무언가를 쓰려는 이에게는 오히려 순간 집중도와 몰입 능력이 급격하게 높아지기도 한다.



그렇게 꾸역꾸역 써 내려간 글은 온라인 공간을 통해 세상 밖으로 퍼져나갔다. 소셜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사람들 간에 네트워크를 위해 기능하므로, 자연스레 글에 대한 반응과 공유가 뒤따랐다. 글쓰기 서비스인 브런치(brunch.co.kr)는 가벼운 콘텐츠가 넘쳐나는 온라인 미디어 시대에 나처럼 글 쓸 공간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구세주와도 같았다. 독자들은 댓글을 달고 토론을 하고 글을 퍼 나르면서 관심을 표현했다. 이 모든 일들은 큰 기쁨이었다.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하는 온라인은 글 쓰는 동기를 충족시키는 데 최적화된 공간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욕망, 타인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동의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강원국의 글쓰기》의 강원국은 “글쓰는 사람은 태생이 ‘관종’”이며 “글을 쓰는 이유는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털어놓는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여성에게, 세상에 말을 걸고 타인으로부터 공감을 얻는 일만큼이나 절실한 일이 또 있을까.


나를 드러내고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IT 기술을 통해 보다 용이하게 실현되는 시대. 누구든 편리하게 온라인으로 세상에 접속하고 언제든 넓은 세계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연대하는 다수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 연대하는 개인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이런 시대를 만들어준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는 그래서 나에게, 또 간절함을 지닌 우리 모두에게 구원이다.

이전 10화 소외된 자의 낮은 눈높이로 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