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고은 Jan 04. 2019

태어난 여성, 길러진 여성

3-1. 결핍과 충족의 글쓰기

생각해보면 없지 않았다. ‘여자라서’, ‘여자니까’, ‘여자인 주제에’라는 이유로 나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받은 일들 말이다. 나보다 아홉 살 어린 남동생이 항상 나보다 먼저 제사상에 절을 올렸던 일, 몸 곳곳에 잔털이 없어야 여성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로 고통스러운 레이저 제모 시술을 받았던 일, “안경 쓴 여자는 아침 첫 택시를 안 태워준다”는 속설 때문에 안경을 벗어든 채 택시를 잡았던 일…. 이밖에도 ‘여성’이라는 내 정체성 때문에 겪게 된 부당하고 유쾌하지 않은, 크고 작은 일들은 시시때때로 있었다. 돌이켜보면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런 일들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었던 20대에는 그런 현실을 별로 인지하지 못했다. 대학 교양 과목이었던 ‘여성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도 그랬다. 페미니즘이란 그저 흥미로운 학문이자 인류 진보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여성 문제가 현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정작 내 일상과 연결 지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심각한 폭력과 위압으로 삶을 제약받는, 일부 여성들의 화두라고만 보았다. 내가 일상 속에서 겪어온 성차별이나 여성으로서 느꼈던 크고 작은 한계는 마치 공기 같은 것이어서, 큰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못했다.


왜일까. ‘알파걸(Alpha-girl)’ 세대인 나는 스스로를 알파걸이라 생각했고, 차별과 억압, 그로 인한 결핍의 경험은 내 삶과 무관하다고 믿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력 있고 뛰어난 여성에게는 좌절과 실패의 경험보다 도전과 성취의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라 다짐했다. 물론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그것이 남성 중심적인 질서 아래 오랫동안 작동해온 이 사회가 변화의 물결에 떠밀려 여성, 그것도 젊고 새로운 세대의 여성만을 위해 털끝만큼 겨우 내어준 몫임을 몰랐다.



나는 이 질서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고자 했지만 결국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면서 무너졌다.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겪는 소외와 배제, 차별로 인한 고통을 그제야 피부로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스스로 여성임에도 책으로, 머리로만 알았던 여성의 문제를 드디어 체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완전한 성찰을 얻을 수 없는 한계적 존재임을 이때 깨달았다.


엄마가 되는 것은 이제껏 내가 개인으로서 도전하고 성취했던 기존의 과제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돌본다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는 사회적으로는 독립된 인격체이면서도, 생물학적으로는 아직 존재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생명체에 불과했다. 그런 모순된 존재를 이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키워내는 데는 양육자의 뭉근하고 끈질긴 노동이 필요했다. 성인의 언어와 이 사회의 속도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돌봄 노동’. 아이를 돌보는 일과 개인적 성취를 추구하는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일을 동시에 잘 해내는 것은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불가능했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에 내몰렸다.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짧지만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생활이 활발해진 꽤 오래전부터, 수많은 선배 세대 여성들은 반 강제적으로 사회적 이름을 잃어왔다. 사회적 노동 시장에서 절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던 여성들에게는 그저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여성에게 지워진 가정과 육아를 돌보는 노동의 의무를 제3의 누군가에게 완전히 위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이들만이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일터에 남은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명예 남성’으로 단련했다.



막상 선택에 내몰리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 차례는 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아무런 준비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보아온 선배 여성들의 삶을 그대로 수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뱃속에서 잉태된 생명을 내 손으로 길러내는 기쁨과 충족을 외면하기 싫었다. 30여 년간 성취를 향해 달려온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 역시 포기할 수 없었다.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포기하라는 것인지, 그때부터 세상이 원망스럽기 시작했다.


계산기를 두드려 스스로 사표를 썼다. 나는 양가 부모님에게 육아를 위탁할 수 없었다. 믿고 의지할 만한 제3의 양육자를 찾지 못했고, 적극적으로 찾을 의지도 없었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면 당연히 내 몫이어야 했다. 똑같이 공부하고 대학에 가서 취업해 사회생활을 하지만, 직업과 직무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나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받는 남편은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개인과 가정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남성이 100만원을 벌 때 여성은 평균 약 63만원을 받는 대한민국의 현실(2016년 OECD ‘성별 임금격차’ 기준) 속에서, 우리 가정과 비슷한 상황이라면 나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여성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런 나의 퇴사는 과연 자발적인 것인가?


노력과 성취라는 내 삶의 기본 작동기제가 무의미해지면서, 나는 근본적인 질문들에 직면했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내 생물학적·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재정의로 이어졌다.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자, 그제야 나보다 더 앞서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온 다른 여성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이제껏 내게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음을 깨달았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리는 여성은 얼마나 많았던가. 아예 취업시장에서 배제되는 여성은 얼마나 많았던가.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거나, 타고난 기질을 억압받거나, 혹은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조차 못했던 여성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니, 여성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 주류로부터 비껴서 있는 수많은 ‘타자’들의 삶은 어떠한가. 경험하지 못해 어림짐작조차 쉽지 않은 크고 작게 가난한 다양한 삶들. 주류를 지향하며 앞으로만 내달리는 삶은 스스로 소외와 배제의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진심으로 주변을 자각하기 어렵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면서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게 엄마로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 구절에 이리 몰입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는 남성적 질서, 주류와 비주류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더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자로서의 일은 이성적 사고과 논리적 판단을 중시했고, 한국 사회의 교육은 경쟁해 이기고 남을 짓눌러서 살아남는 질서를 가르쳤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으려면 얼마 안 되는 여성의 몫을 놓고 여성끼리 경쟁해야 하고, 남녀 간에 뚜렷이 구분된 역할의 경계를 넘나들려고 하지 않아야 했다. 그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치열하고 고된 삶이겠지만, 그렇게 인생을 채우는 것이 삶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여성이라는 프레임 안과 밖에서 스스로를 객관화해볼 기회가 없다면, 우리를 잠식한 굴절된 세계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의 항로가 바뀌는 경험에 대한 사유는 그저 머릿속에서, 입속에서 맴돌기에는 부족했다.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다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기사를 수집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된 후로 만난 이들과의 대화, 공격적으로 흡수한 수많은 텍스트들은 여성으로서 내 삶을 새롭게 정의하는 토대가 되었다. 인간은 거대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철저하게 규정되며, 사회가 정한 틀과 기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범위 역시 제한적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사회구조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독립적 존재라는 사실. 나는 어느새 이 두 간극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전 07화 사실이 실종된 시대의 글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