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 <걱정 말아요, 그대> 이적 -
얼마 전 집 근처 호수공원의 음악분수쇼에서 <걱정 말아요, 그대>가 흘러나왔다. 이미 알고 있는 노래인데도 그날 처음 들은 노래처럼 가슴에 들어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인공지능(AI) 스피커에 이 노래를 틀어달라고 주문하고, 다른 가수들이 부른 버전도 들었다. 그러다가 가족 모두 외출을 해서 집에 혼자 있을 때, 이 노래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내 마음을 어루만진 부분은 바로 이 대목.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돌아보면 아이들의 엄마가 된 후 지난 8년간, 나 자신을 위해 음악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지난해였던가. 패널로 출연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가벼운 질문으로 "이 기자는 요즘 어떤 음악 듣습니까?"하고 물었는데, 당황하다가 "아... 아기 상어?"라고 대답했던 적이 있다. 시사 프로에서 아기 상어라니. 정말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질 만큼 떠오르는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자주 듣던 동요 제목을 말해버렸다. 그땐 요즘 유행하는 노래도, 예전에 즐겨 듣던 노래조차도 머릿속에서 삭제돼 있었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감상하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여가조차도 사치처럼 여겨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중하고, 때론 무겁고 버거워서, 나를 위한 시간을 누리는 것이 송구했다. 아니, 사실 그럴 기회조차도 드물었다. 거기에다 회사에 나가지 않고 프리랜서 형태로 일하는 입장이다 보니, 나는 내게 확보된 나만의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모조리 일하는 데 쏟아부어야 마땅했다.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으므로.
코로나19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요즘이지만, 역설적으로 나를 위한 시간을 찾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지금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에서 1단계로 완화돼 첫째 아이가 매일 학교에 가고 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두 아이를 위해 삼시세끼 차리고 먹이고 치우는 일이 매일 반복됐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의 온라인 수업은 보호자가 없으면 원활하게 진행되기 어려웠고, 연중에 귀국해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있는 둘째 아이의 돌봄 역시 하루 종일 이어졌다. 지금도 그런 일상에 큰 변화는 없다.
남편이 이따금 두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밀린 일감들을 해치운다. 여전히, 회사에 출퇴근하지 않는 나에게 일을 의뢰하는 제3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러나 코로나19 이전에 비해 악화된 조건이라면, 카페나 도서관에 갈 수 없어 재택근무를 한다는 것이다. 자연히 집중도는 현저히 떨어진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있어도 자꾸만 엄마를 찾는다. 그래서 탐색과 집중을 요하는 일들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미루게 됐다. 어느새 내게 남겨진 일은 몰입도가 적은, 비교적 단순한 글쓰기 작업들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대로 소중하고 빛난다는 걸 안다. 모공 하나 안 보이는 뽀얗고 야문 피부에 볼을 비비는 일도, 나를 보고 반짝이는 눈망울에 뽀뽀를 쏟아붓는 일도, 잠든 아이의 길어진 다리를 만지고 주무르는 일도. 이 시간이 아니면 누릴 수 없음을 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뭉클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양극의 기분. 이 양가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날은 대체 언제일까. 감정의 외줄 타기를 하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하다가, 나는 "새로움을 잃어버렸죠"라는 노랫가사에 코 끝이 시큰해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새로움을 갈망하면서도, 어디에서부터 나의 새로움을 찾아야 할지 막막해진 오늘날. 나는 우선, 아이들을 위한 음악 대신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음악을 찾아 듣기로 했다. 얼마 전 아이들을 위해 새로 산 피아노도 나를 위해 더듬더듬 연주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이제는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즐기기를 바라면서. 이따금 남편이 생전에 시아버님이 듣던 음악을 찾아 들으며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은 내가 10대 때 듣던 유행 가요와 헤비메탈, 감성 가득한 20대 때 듣던 팝과 재즈도 듣는다. 패닉과 토이, 이승환을 듣고, 로라 피기와 노라 존스, 데이브 브루벡을 듣는다. 문득 치기 어린 그때의 내가 떠올라 화끈거릴 때도 있다. 쇼팽과 드뷔시를 듣고, 마이클 부블레와 마룬 파이브도 듣는다. 음원 사이트의 차트에 랭킹된 요즘 노래도 듣는다. 'Dynamite'를 흥얼거리고 'Don't touch me'에 들썩인다. 그냥 다 듣는다. 아이들도 덩달아 90년대 가요에서부터 최신 유행가, 락, 재즈, 클래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들을 감상한다.
오랜 음악도 새로운 음악도, 지금의 내겐 모두 새롭다. 나를 위해 음악을 듣는 시간이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음악이 갖는 치유력, 그 효능이 몇 배는 커진 듯하다. 이젠 자유롭게 흐르는 음악 속에서 스스로를 돌보고자 한다. 그동안 규정된 역할 속에서 잃은 것이 무엇인지, 돌보지 못했던 나의 마음은 지금 어떤지 들여다보려 한다. 물론 모든 게 나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지나간 잘못된 것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지난 시간들은 나의 최선이었으니, 다가올 시간이 다시 나를 새롭게 만들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자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이적에 앞서 들국화가, 하현우와 곽진언이, 조정석과 디오(D.O.)가 같은 노래, 다른 음색으로 이렇게 응원했듯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