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고은 May 13. 2024

자의 반 타의 반 N잡러

30장의 원천징수영수증이 말해주는 것들

"나도 N잡러였구나!"


몇 년 전부터 스스로를 'N잡러'로 부르기 시작했다. N잡은 2개 이상의 복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뜻하는 '일(Job)'의 합성어로, 오늘날 N잡러는 본업 외에 다양한 일수행하며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란 의미로 통용된다. 처음부터 N잡러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N잡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이던 신문사에서 정년퇴직을 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예상과 달리 출산·육아 문제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0년 여만에 퇴사를 했다. 다행히 그 후로도 예상치 못한 다양한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얻었다. 퇴사 후 커리어가 끊기는 게 두려워, 나를 찾아주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해 성심성의껏 일해온 결과였다. 첫 직장에서 그런 자세로 일했더라면 어쩌면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반성할 정도였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N잡러가 됐다.


2020년, '어쩌다 공무원'으로 4년 만에 다시 갖게 된 정규직 일자리에서 내가 그간 명백한 N잡러가 되었음을 절감했다. 연말정산을 위해 제출한 전년도 원천징수영수증이 무려 30장에 달했기 때문이다. 방송, 강연, 원고 집필…. 모두 글쓰기에 기반했지만, 일의 종류와 형태는 다양했다. 언론사, 기업, 공공기관, 도서관, 사회단체, 개인…. 나의 노동을 요구하는 주체도, 동기도 다양했다. 여기에서 N잡은 무엇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할까? 일자리의 종류? 계약관계를 맺은 상대의 숫자? 아니면 원천징수영수증에 기재된 소득구분코드의 개수?


30장의 원천징수영수증 서류 뭉치를 건네받은 행정주무관은 놀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우와. 이게 다 뭐예요? 이렇게 많이 제출하시는 분 처음 봐요. 진짜 열심히 사셨군요!"


그 서류 뭉치들은 내가 조직에 속하지 않고 오롯이 개인으로 일하면서도 나의 영역을 꾸준히 확장해 왔다는 증거였다. 지난 4년의 세월이 커리어의 단절과 공백이 아니라, 야생 속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역량을 키워온 시간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혼자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들은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무소속 노동자로 일하면서 쌓은 N잡러의 내공은 새 직장에서 발휘되었다. 너무나 견고해서 변화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큰 조직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실험은 요구되고,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 누군가가 항상 필요하다. 나는 그런 일에 두려움 없는 사람이었고 매번 열과 성을 다했다. 나를 증명하는 것이 조직이라는 울타리나 명함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어공'으로서 임기가 끝날 때쯤에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스스로 사표를 냈다. 당시 코로나19라는 세계적 혼란 속에서 위기 대응을 하는 것이 나의 주요 업무였는데, 임기가 끝날 때쯤이 되자 팬데믹도 종료됐다. 나는  역량을 십분 발휘하게 만들던 위기가 사라지면서 일터의 환경도 변했다고 여겼고,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문을 찾아 나아가길 원했다. 지금은 그동안 쌓아온 이력들을 토대로 다른 문을 찾았는데, 새로운 문을 열고 옮겨온 조직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여 일과 생활의 균형을 추구하는 실존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몇 번의 이직과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경험하면서, 나는 일에 있어서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됐다. 조직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신성시하는 것은 이제 구시대 유물과도 같은 관념이 되어 버렸다. 평생직장의 개념은 희소해졌고, 적정한 때에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에 성공하는 자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시대다. '직장=일'이라고 생각했던 전통적 공식도 도전을 맞닥뜨린 지 오래다. 노동 환경은 계속 변화하고, 삶의 방식도 함께 바뀌어 간다.


최근 나는 N잡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새롭게 규정하기로 했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본업 외에 N개의 추가 부업을 하면서 소득을 올리는 사람만 N잡러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고령화로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누구나 평생 동안 여러 개의 일과 직장을 아우르는 N잡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양한 이직과 경력 이동을 모두 아울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의의 N잡러'가 될 것이다. 자의 반 타의 반 N잡러가 될 수밖에 없는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조직을 넘어 오롯이 개인의 역량과 브랜드만으로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시대가.


인생은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와 급작스러운 사고로 변주된다. 언제 어떻게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 눈앞에 찾아온 기회를 잡으려면, 자신의 가치를 꾸준히 갱신하기 위해 묵묵히 단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나는 종종 30장의 원천징수영수증을 떠올린다. 일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때의 나를 잊지 않으려 한다. N잡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그 절실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