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아이를 챙겨주면 처음에는 단순히 피곤하고 졸리기만 했는데 익숙해질수록 많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단 새벽에 일어나면 배고픈 우리 아이를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수유를 하다 보면 곤히 자고 있는 아내가 보이면서 내가 수유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우리 아이가 잠들기 시작한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가 깊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더욱더 보람이 느껴진다. 아이가 잠든 후 조용히 숨을 돌리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머릿속에서 정신없었던 하루가 정리되고 다양한 감정들이 솟아오르고 다양한 상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 감정과 상상이 너무 재미있어서 아이를 챙겨주려면 다시 자야 한다는 이성과 충돌한다. 가만히 누워있다가 감정과 상상이 이성을 이기는 날에는 혼자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노트북을 켜고 글을 적는다.
제이를 챙겨주면서 새벽은 풍부한 감정들이 기다리는 기대의 시간이 되었다. 제이를 챙겨주기 이전의 새벽을 상상해 보면 새벽은 마주치면 안 되는 위험하고 끔찍한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새벽은 현실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견뎌내기 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학생 때는 시험을 잘 보고 졸업을 하기 위해 피곤하지만 버티면서 공부를 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급한 업무가 발생하면 하기 싫지만 초조한 긴장감을 느끼며 대응을 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스트레스가 너무 많은 날이면 불면증이 찾아와 1분 1초가 나를 피 말리게 하는 시간이었다. 가끔은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과하게 하여 나의 일상의 균형을 깨뜨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영화 속이나 티비를 보면 범죄가 일어나는 외롭고 무서운 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끔찍한 시간이었던 새벽이 우리 제이를 만나고 나서 변하였다. 배고픈 우리 아이를 챙겨줄 수 있는 시간, 정신없었던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귀여운 우리 아이 자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 힘든 아내를 도울 수 있는 시간, 감정이 풍부해져서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제이를 만나고 변한 줄 알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나의 새벽을 찾아 준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의 새벽도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다. 소풍처럼 기대가 많이 되는 날이면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하는 시간이었고, 아름답게 타오르는 양초를 구경하던 시간이었고, 아름다운 별을 구경하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인 공간이 없던 어린 나에게 걷는 모든 공간이 개인적인 공간이 되도록 해주는 시간이었다. 미래에 내가 무엇을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이었고 내가 하던 걱정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어린 나에게 새벽은 온전히 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은밀한 아지트와 같은 굉장한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나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가득했었다. 이런 새벽이 언제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끔찍해진 건지 모르겠다. 제이가 아니었다면 원래 나의 새벽이 이렇게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제이야, 아빠의 새벽을 찾아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