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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이 Jul 03. 2022

너의 목소리가 들려



오래된 주택가에 살고 있다. 수십 년 된 집들은 하나둘씩 다가구나 빌라로 변신했지만 여전히 다수는 살아남아 있다. 나이 든 이웃들도 오래전 마당에 심긴 목련이나 감나무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낡은 집들이 많아 일 년 내내 어디선가 집수리하는 소음이 들려오고 점심시간이면 동네 뒤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폭죽처럼 터진다.


아침저녁으로 들르는 트럭 야채 장수와 생선 장수의 확성기 소리, 골목을 떠도는 고양이들의 교태 넘치는 소리는 잡음이라면 잡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네는 평일이나 주말 할 것 없이 대체로 평화롭다. 특히 점심을 먹고 난 늘어지는 오후엔 온 동네가 깊은 낮잠에 빠진 듯 고요해진다.  


그런데 여느 때와 같은 오후, 갑자기 귀청을 때리는 고함 소리가 그 적막을 깼다.

“조용히 하슈!”

나이 든 할머니의 억센 음성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몇 달 전 옆집에 이사 온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30분, 어떤 때는 1시간씩 쉬지 않고 계속 누군가를 꾸짖었다. 나중에는 너무 격하게 울부짖어서 목이 쉴 정도였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를 상대로 소리를 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우리 집이 아니면 내가 그 항의의 원인일까, 처음에는 움찔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둘러봐도 시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할머니만이 시끄럽다고 악을 쓸 뿐. 

할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악을 쓰다가 나중에는 화를 못 견뎌 우리 집 쪽으로 향한 창문을 두드리며 난동을 피웠다. 우리 집 누군가가 새벽마다 자기 집 창문을 두드려 잠을 못 잔다며 두 번이나 찾아오기도 했다. 그 시점에 할머니의 딸과 연락이 됐다. 나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 하루하루가 지옥 같을 때였다.  


 

알고 보니 간밤에 그 집에 사는 사람들 죄다 허공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은 거야. 머슴 하나는 글쎄 뒷간에서도 들었다나. 그런데 그 못된 목소리가 하루 이틀 들리는 게 아냐.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을 넘기더니 닷새 엿새 이레 여드레를 넘기도록 들려. 귀신 짓임에 틀림없는 거지. 집안 식구들 모두 시도 때도 없이 속살거리는 귀신 목소리에 피가 마를 지경이야.     

(목소리 귀신- 무서운 옛이야기,  p199)     



할머니는 오래전 교통사고를 당해 뇌를 다쳤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듣게 됐다. 원래도 나이에 비해 청력이 쌩쌩했는데 이제는 아무도 못 듣는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이다. 

할머니의 머릿속에서는 하루 종일 누군가 사방 벽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고 자신을 못살게 굴었다. 특히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누군가 잠을 못 자게 밤새 자신의 방 창문을 두드려대는 것이었다. 


이 동네 집들은 서로 창을 마주 볼 만큼 붙어 있는데 분명 그 이웃집들 중 하나가 범인이었다. 그게 바로 우리 집이었다. 할머니는 모두가 나가고 나 홀로 있는 집에 찾아와 시끄럽다고 하소연했다. 지금도 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고. 아무리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환장할 노릇이었다.      


할머니의 믿음이 너무 확고해서 가끔은 나도 흔들렸다. 정말 할머니는 들을 수 있고 나는 놓치고 있는 소음이 있는 게 아닐까? 할머니와의 실랑이에 시달려 나까지 미쳐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쳐가던 중 할머니가 다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동안 집을 내놨는데 드디어 나갔다며 할머니의 딸이 알려왔다. 병원을 계속 다니고 약도 늘렸지만 할머니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걸로 2년 간의 고통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옆 집에 중년 부부가 이사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조용해서 사는지 안 사는지 모를 정도였다.        


할머니가 확실히 이사를 가고 난 후 드디어 내게도 평온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할머니의 난동에 시달리지도 않고 있지도 않은 소음의 근원을 찾아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할머니의 외마디 비명이 다시 들려왔다. 미친 듯이 창문을 때리며 우리 집 쪽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할머니의 격한 음성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불안하게 옆집 창문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의 자취를 찾았다. 할머니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니라면 귀청 찢어지는 고함의 정체는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햇살만 하얗게 부서지고 있을 뿐, 동네는 고요했다. 나는 한동안 계단가에 서 있다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다시 집안으로 돌아왔다. 방금 소리의 그 누군가에게 정말 "조용히 하슈!"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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