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 걱정은 사라져라
여름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나는데도 전혀 아침 같지 않은 겨울날이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오들오들 떨며 옷을 걸친 뒤 거실로 나온다. 밤새 중단한 난방 때문에 집안은 냉기가 흐르고 나이 드신 부모님이 잠든 안방은 아직 고요하다. 일요일이라 열렬한 종이 신문 애독자인 아버지도 늦잠을 청하신다.
주방 등을 켜고 가스레인지 밸브를 연다. 냄비에 정수된 물을 붓고 둥굴레 차를 끓인다. 환기를 위해 거실 한 면을 다 차지하는 커다란 창을 여니 한밤중 같은 시커먼 하늘이 내려다본다. 살을 에일 듯 날카로운 바람에 오싹해진다.
요즘 엄마는 아무래도 노환이 찾아온 듯하다. 허리 디스크, 위장 장애, 이명...뭐라 이름 붙이든 결국은 모두 ‘나이가 들어서’라는 해석으로 귀결된다. 하루 종일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늘었고 집안일은 어느덧 내 차지가 됐다.
냉장고를 열고 부모님이 일어나기 전에 뭔가 아침 반찬 한 가지를 하려고 궁리한다. 싸늘한 냉장고의 기운이 안 그래도 취약한 컨디션에 일격을 가한다. 아까 거실창을 열었을 때 찬바람을 쐬었기 때문일까. 아침부터 찬물에 손을 담갔기 때문일까. 머리가 띵하면서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이럴 때 내가 찾을 수 있는 해결책은 하나, 타이레놀이다. 누구는 냉장고 가득 온갖 보약과 과일즙을 쟁여놓고 식탁에는 영양제와 비타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보물단지처럼 여긴다는데. 해열제이자 감기약인 타이레놀을 마법의 약처럼 신봉한 지 오래됐다.
타이레놀의 약효는 느리지만 확실히 작용한다. 머리를 죄는 두통을 잠재우고 으슬으슬한 몸살 기운도 가라앉힌다. 감기 기운을 쫓으며 가라앉았던 의욕을 북돋워 집안일을 해치우는데 도움을 주니 나에게는 박카스 저리 가라 하는 강장제 역할도 한다.
단 타이레놀을 남용하면 간에 부담을 주니 일주일에 2알 반까지로 양을 조절해야 한다고 한다. 하루 세 번 네 번도 덜컥 덜컥 알약을 삼키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 후론 500mg 한 알을 이빨로 쪼개 반알, 혹은 삼분의 일씩 아껴 먹는다.
코로나 시절, 타이레놀 품귀 현상이 일어나자 제일 안절부절못하던 나였다. 종합비타민보다 더 애용하는 타이레놀을 냉장고 옆 약선반에 소중히 모신다. 무언가에 잘 중독되지 않는 나에게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약.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타이레놀을 삼키며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