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이다
한때 소소한 번역 일로 돈을 벌었다. 영어 회화 잡지에 미드나 CNN 뉴스 해석을 올리는 일이었다. 번역 일감을 따와서 작업하기도 했다. 내 이름으로 나가진 않았지만 몇 권 분량의 마케팅서를 번역했다.
이주 정도 기한을 주고 엄청난 분량을 맡기는 식이라 하루 시간을 타이트하게 써야 했다. 장당 번역료를 계산해보면 그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과 비슷했다. 일단 일이 들어오면 원고를 넘길 때까지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거의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식음전폐 수준으로 일을 했다.
작가가 되자 하루 일과는 온전히 내 손에 맡겨졌다. 누가 글을 쓰라고 강요하는 상황도 아니니 쓰든 말든, 얼마를 쓰든 순전히 내 마음에 달렸다. 원래 어딘가에 소속되어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생활을 싫어했으므로 작가는 내 체질과 맞는 것 같았다.
원래 내 상상은 아침에 일어나 커피 한잔을 마시고 책상 앞에 앉는 거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 노트북을 켜고 포털에 올라온 뉴스를 살펴보는 것까지는 허용이 됐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알아야 하고 좋은 정보나 아이디어도 그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부모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내 생활의 주도권이 온전히 내게 있지 않았다. 매일 아침은 엄마를 도와 밥상을 차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까지 마쳐야 겨우 노트북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 났다.
한숨을 돌리며 신문 헤드라인을 훑고 이메일을 확인한 후 온라인 쇼핑몰에서 장도 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10시가 넘어서고 띵동! 집배원이 벨을 누른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르는 집배원이 손에 한 아름, 우편물을 건네준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아까 중단된 일을 마저 하고 이제 뭔가 써볼까 시동을 건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 어느새 시간이 정오에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이번에는 점심상을 차릴 차례다.
다시 아침과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데 이번에는 밥을 먹은 후에 빨래를 한다거나 오후에 도착하는 다른 택배를 받아 처리한다는 점이 다르다. 앉았다 일어났다 하다 보면 또다시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여전히 글은 한자도 못 쓴 상태고 머릿속만 어지럽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집의 문제들은 모두 내 문제가 되어 버렸다. 집구석 어디에 하자도 생겨도, 전자제품이 고장 나도, 누군가 대문에 찾아와도, 심지어 옆집과의 다툼까지 집에 관련된 문제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바로 ‘집’ 그 자체였다.
어쩌다 집에 혼자 남을 때가 있었다. 부모님이 외출하고 동네도 조용하고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드물지만 귀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조차 나는 어느새 집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텅 빈 집에 가만히 있으면 커다란 집의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벽 속을 지나는 수도관 속에는 핏줄처럼 물이 흐르고, 스위치를 켜면 눈을 반짝 뜨고 집안을 밝힌다. 보일러를 틀면 집의 체온이 오르고 화장실에서 내린 물은 배설을 하듯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집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였다.
집은 섬세한 돌봄의 기술이 필요한 동물이기도 했다. 매일 씻기고 닦아주고 좋은 공기를 마시게 해 주고 너무 덥지 않게, 너무 춥지 않게 건강관리도 해줘야 한다. 간혹 삐걱거리거나 탈이 나면 손을 봐주고, 소모품도 제깍제깍 갈아줘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의 본업은 어느덧 ‘집 돌보미’로 변해갔다. 한마디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집안일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밤에 자려고 누워 오늘 내가 뭘 했나,를 되돌아보면 허탈하기 일쑤였다. 전업주부의 고충을 절실히 알 것 같았다. 내가 바로 결혼하지 않은 전업주부였다.
나와는 달리 ‘집순이’를 자처하는 다른 프리랜서 분들은 자신의 집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았다. 집에 있는 자체가 힘겨운 나와 달리, 작고 소중한 자신만의 물건들로 집을 꾸미고 쓸고 닦고 알뜰히 가꾸는 것 같았다.
물론 집에서는 일이 안 된다며 집 밖에서 작업실을 찾는 분들도 있긴 했다. 어떤 분들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어떤 분들은 도서관, 심지어 PC방의 요란한 게임음 속에서도 홀로 꿋꿋이 워드를 쳤다는 작가도 들어봤다.
내가 ‘집’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집이 나 혼자 글을 쓰는 ‘작업실’ 개념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부대끼는 ‘가정집’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출퇴근 고충 없고 외모나 복장의 간섭도 없이 여유롭고 자유롭게 집에서 글을 쓸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나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내가 사는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