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문노트

분수대로 살아가는 용기

‘분수’

by 책선비

**네이버사전 ‘분수’ 검색


1.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

2.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3. 사람으로서 일정하게 이를 수 있는 한계.

4. 정수 a를 0이 아닌 정수 b로 나눈 몫을 a/b로 표시한 것. (분자와 분모)

5. 압력으로 좁은 구멍을 통하여 물을 위로 세차게 내뿜거나 뿌리도록 만든 설비. 또는 그 물.




10여 년 전 동네에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에는 예쁜 분수가 있고 여름에는 정기적으로 틀어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참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과 저녁 늦게 그곳을 찾았다.


아파트 근처에 갈수록 물 뿜는 소리와 아이들의 웃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우리 아이들도 들뜨며 설레는 듯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을 지나니 아파트 광장 한가운데 기다란 반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물줄기들이 은은한 조명과 함께 춤추고 있었다. 온몸을 젖은 채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아이들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주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들. 모두 아파트 주민들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물ㅈ루기가 잦아들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대충 닦으며 “집에 가서 바로 씻으면 돼”라며 흩어졌다. 우리는 젖은 수간을 차 의자에 깔고 네 아이를 태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안 와도 될 것 같아.” “그래.”


10년이 지나 분수가 있는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분수는 꽤 오랫동안 가동되지는 않은 채 그저 관상용으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처음 오픈했을 때는 무척 예쁜 분수였을 것 같았다. 분수의 시원한 맛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거나 축구도 하면서 2년을 지냈다.


올해 초 다시 이사를 고민하면서 초초초 무리를 해서 새 아파트를 갈 것인가, 분수에 맞는 집을 고를 것인가를 고민했다. 새 아파트들은 이미 분수를 너머 다른 매력적인 부대시절을 갖추고 입주자들을 모으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분수에 맞게 평수도 줄이고 더 오래된 아파트에 전세로 왔다.


이사를 오면서 건조기를 버렸다. 막내를 낳고 8년 이상 잘 사용했던 80만 원짜리 중국제 미디어 건조기. 당시 200만 원 넘는 삼성 또는 엘지 건조기를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날, 남편은 직장 동료들과 대화하는 하다가 우리 집도 건조기를 샀다고 말했단다. 삼성 거냐는 상대방의 질문에 남편은 그렇다는 표정만 짓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동료가 너무 당연히 삼성 제품을 샀을 거라고 확신했고, 이후에 삼성 건조기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대고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


분수대로 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움츠러들 때가 있다. 형편에 맞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스스로 다독이지만, 그 말이 씁쓸하게 남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건조기 이야기가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였을까. 이사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은 “건조기를 꼭 사야겠다”고 했다. 나는 중고 거래 앱에서 삼성이나 LG 제품을 찾아봤다. 가장 싼 것이 10년 된 30만 원짜리였고, 대부분은 50만 원ㅇㄹ 넘었다. 남편은 너무 비싸다며 직잡 알아보더니, 5년 된 sk매직 건조기를 15만원에 구해왔다. 힘들게 들여놓았지만,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이제 남편은 국산 건조기를 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분수 없는 아파트에 살아도, 분수대로 사는 우리 삶을 더 단단히 껴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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