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백수 시절을 떠올리며
초등학교 3학년 딸은 학교에 다녀오면 나한테 곧바로 달려와 뽀뽀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웠던 것 중에 재미있는 부분을 천천히 간략하게 말한다. 담임 선생님이 낸 난센스 문제가 무엇인지, 처음 마주했을 때 막막했던 심정, 갑자기 실마리가 떠올랐던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환하게 웃는다. 자기가 맞췄다고, 고민고민 하다가 해결했을 때 뿌듯했다고 한다.
어느 날, 딸은 집에 오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침에 학교 갈 때만 해도 오늘 6교시라서 시간이 무척 천천히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수업을 다 듣고 집에 왔다며 놀라워했다. "시간이 그냥 갔어. 신기해"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는 이마, 약간 상기된 빨간 볼과 옅은 미소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충만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학교가 그리 재미있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 코를 찡긋하며 엄마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어쩌나 하는 표정을 살짝 지었다. 이마에 살짝 내려온 곱슬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총총 자기 방으로 갔다.
8년 전에 막내가 6개월일 때 고만고만한 아이 4명을 키우며 한 독서공동체에서 책 읽기와 글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배움이란 그렇다. 온 사방이 육아 천지인데 책이라도 잡고 있으면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생각, 다른 관점, 다른 느낌을 하나씩 배웠다. 암기해서 성적을 내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공부였다. 잠을 줄이고 엄마들 모임도 포기했다. 알아서 몸이 스스로 움직였다. 자투리 시간에 겨우 읽는 책 한 구절에 울고 웃었던 나날들. 온종일 육아가 끝나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살아야지. 이 희망으로 긴 육아 기간을 견디었다.
막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마자 룰루랄라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을 향했다. 일명 도서관 백수. 스스로 도백이라고 칭하고 필명 책선비답게 책 읽고 놀았다. 내가 즐겨 갔던 도서관에는 우리 집보다 더 좋은 근사한 책상이 있었다. 창가 바로 옆에서 적당히 햇살을 머금고는 항상 나를 기다렸다. 나는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고 곧바로 신간 코너에 달려갔다.
찬찬히 새 책을 탐색하고는 끌리는 대로 고른다. 집에서 가져온 책과 신간을 두루 탐색하다 보면 곧 점심시간이 된다. 도시락을 까먹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제대로 책을 읽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졸음은 쏟아지고 책장은 쉬이 넘겨지지 않는다. 아이 올 시간이 다 되어 부리나케 가방을 챙기고 도서관을 나선다. 말 그대로 시간이 쏜살같이 가버렸던 순간들. 천국이 따로 없었던 나날들. 다시 오지 않을, 꿈만 같았던 나의 도백 생활. 이때 내 모습은 마치 학교 생활이 즐거운 딸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도서관 백수 시절은 곧 청산되었다. 수료증을 위한 책 읽기와 논제 쓰기, 고된 서평 쓰기의 시간으로 어어졌다. 필요한 훈련의 시간이었고 많이 성장하고 보람도 컸다. 지금의 내 일을 가능하게 한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어떤 결과물의 압박감 없이 읽고 쓰기 그 자체가 즐겁고 따듯해서 저절로 몰입이 되었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땐 그랬고, 또 이 추억이 있어서 지금도 좋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