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엄마와 20년 만에 화해
셋째는 딸이었다. 아들 둘 키우다 딸을 만나니 훨씬 수월하고 좋았다. 조용하고 무난한 스타일. 책을 좋아하고 알아서 잘 노는 아이. 아들 둘이랑 있다가 딸만 데리고 있으면 분위기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둘 다 좋지만 딸과는 있을 때는 아무래도 여유로웠다. 무엇보다 딸은 말을 하게 되면서 조근조근 질문도 하고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했다. 만화 속 캐릭터처럼 깜찍한 표정과 혀 짧은 소리로.
"엄마의 엄마는 어디 있어?"
"아, 돌아가셨어. 하늘나라에게 계셔."
"엄마의 엄마는 어땠어?"
"......"
어땠어?라고 물었는지, 어떤 사람이야?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7살짜리가 이런 질문을 했을까 싶은데 분명 외할머니를 궁금해했다. 자신이 엄마를 진심 사랑하는 것처럼 엄마도 외할머니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묻는 듯했다. 기대감을 가득 품은 동그란 눈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당황하는 낯빛을 본 아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더듬더듬 거리며 "외할머니? 어.... 땠을까... 진선이가 외할머니가 궁금하구나"라고 얼버무렸다. 최초였다. 아이의 질문에 심장이 쿵 내려앉다니. 너무 크게 들려서 순간 아찔했다. 아이 세 명을 낳고 기를 때까지도 엄마를 별로 떠올리지 않았다. 악몽을 꿀 때만 빼고.
11살인 나는 반지하 집 앞 대문 앞에 서 있다. 온천장 지하철 역은 지하가 아니라 지상이어서 지하철이 오고 가는 것이 다 보인다. 밤 12시가 다 되어 간다. 엄마를 태운 지하철을 언제 올까. 곧 막차인데. 역 입구를 빤히 쳐다본다. 한두 사람이 나오지만 엄마는 아니다. 나는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린다. 그러다 갑자기 11살이었던 내가 갑자기 40살이 된다. 어른이 된 나는 계속 그 자리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내 등뒤로 누군가 손을 뻗는다. 등을 두드리고 말한다. "있잖아. 왜 엄마를 기다리고 있니? 엄마는 이미 20년에 돌아가셨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하철도 대문도 사라지고 암흑으로 변한다. 갑자기 나는 밑으로 마구마구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디라도 발을 닿고 싶은데 아무리 발을 뻗어도 허공이다. 손을 휘젓고 발버둥 쳐도 나는 하염없이 떨어진다.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이 내가 기대하고 지지할 수 없는 것 하나 없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마음을 쓸어내렸다. 더 이상 엄마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다행스러웠다. 지금 행복하고 만족스러운데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나 자라면서 부모님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받는다. 어릴 때는 어렵더라도 40 넘어서 상처 운운하며 부모를 탓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는 과거로 넘기고, 현실에 충실하며 스스로 변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덮어둔다고 해소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셋째의 질문 앞에 이 악몽이 악몽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 나는 지금도 엄마를 기다리고 있구나.' 40이든 50이든 이 고약한 냄새가 풀풀 나는 상처덩어리를 꺼내놓아야 했다. 더 이상 이 냄새를 맡고 싶지 않다. 아이의 질문을 받고 4년이 흘러셔야 겨우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는 일한다고 매일 늦게 왔다. 오지 않는 날도 있었던 것 같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삶이라고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남동생들은 더 어렸고. 엄마는 7남매 중 다섯째였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핸드볼 선수로 스카우트되었지만 형편상 포기해야 했다. 대신에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막내 이모 말로는 엄마가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헤어졌다고 했다. 외삼촌한테 엄청 맞았단다. 내가 제일 잘 따랐던 외삼촌한테. 그땐 이런 게 흠이 되어서 빨리 시집을 보내야 했다. 18살 엄마는 30살 넘은 노총각인 아빠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결혼했다. 아빠의 상황도 무척 열악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7살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재가하셨다. 아빠는 그때부터 25년 동안 외갓집에서 머슴처럼 농사일을 도맡아서 해야 했다.
젠더북클럽에서 여러 책을 읽으며 엄마를 엄마가 아닌, 같은 여성, 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자식을 방치하고 가족을 버린 엄마이자 여자라고만 여겼다. 엄마와 다정하게 대화하며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없다. 지금의 딸과 아기자기하게 지낼 때마다 한 번씩 궁금하긴 했다. 어릴 때 나는 엄마와 이런 적이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없을 것 같아서, 없다고 해도 뭐 어쩌겠냐는 냉소적인 코웃음이 나올까 봐. 그런 내가 너무 불쌍할까 봐.
상처를 덮어두기 위해 좋았던 기억도 전부 지워버렸는지 모른다. 초1학년 때 엄마가 첫 소풍이라고 김밥을 싸주며 웃었던 일, 언젠가 체육시간에 학교에 오셔서 다른 엄마들과 같이 수업을 지켜보셨던 순간이 떠오른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나날들. 하지만 고통과 한숨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엄마 모습만 자주 생각난다. 월급을 떼이고 무기력하게 빈손으로 돌아온 아빠와 싸웠던 모습, 공장에서 일하다가 오른손을 심각하게 다쳐 고생한 일, 폐암 4기를 선고받고 1년 동안 모진 항암 치료를 견디셨던 엄마.
한 번도 그 아픔과 고통에 응답하지 못했다. 철이 좀 빨리 들었다면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다정했을까. 그나마 엄마의 투병생활을 도우며 1년 동안 병원에서 보냈던 시간이 위로가 된다. '결함'을 품고 서로 사랑하기에는 엄마도 나도 어렸다. 엄마는 그때 44살,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올해 초에 엄마가 계신 납골당에 오랜만에 갔다. 납골당 올라가는 길은 언제나 가파르다. 산비탈을 따라 이어진 계단 하나하나에 숨이 찬다. 23년 전 엄마의 유해를 들고 걸어가는 남동생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땐 가파른지도 몰랐고 숨도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44세에 생을 마감한 엄마의 인생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다시 이 길을 아이들 손잡고 올라간다. 가슴에 품은 편지와 함께. 엄마에게 생전 처음 편지를 썼다. 아이들과 같이 썼기에 가능했다. 이 편지를 쓰기 전 일주일 동안 매일 밤 울었다. 편지를 쓸 때도, 가는 길에도, 납골당 앞에서도 계속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왜 자꾸 울어?" 셋째가 묻는다.
"지금이 너무 좋아서 울어."
엄마를 생각하며 좋아서 울다니, 이런 날이 와서 너무 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화해할 수 있어서. 딸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