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번스 <밀크맨>(홍한별 옮김,창비, 2019)를 읽고
이 책은 1970년대 북아일랜드 분쟁 동안 한 지역에 살고 있는 18살 여성이 밀크맨과 만남 이후 겪게 되는 외적 내적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물 건너’ 나라는 영국이며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반대자’는 준군사조직으로 영국에 대항하며 내전 중이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반대자’ 지역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살인과 폭력이 자주 일어나며 모함과 소문으로 이웃을 고발하거나 폭행하는 일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었다.
주인공이 산책하며 책을 읽는 행위는 그 지역에서는 의심스럽고 잘못된 행동이었다. 반대자 조직의 핵심 인물인 ‘밀크맨’의 일방적인 접근에 속수무책 당하는 상황임에도 사람들은 주인공을 향해 비난하고 처단받을지도 모른다며 협박한다. 친구와 가족 조차도.
“불편하다고. 비정상이야. 착시를 일으켜. 공공정신에 위배돼. 자기보호 본능에도 어긋나.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행동이고. 턱 앞에 적이 있고 적에 포위되어 있어. 다들 힘을 합해야 하는 상황에서 뭐 하러 너 자신한테 주의를 그니?” “잠깐만.” 내가 말했다. “네 말은 밀크맨이 셈텍스(폭탄)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괜찮고 내가 집 밖에서 <제인에어>를 읽는 건 안 괜찮다는 말이야?” (284쪽)
정치적 문제 말고 다른 것에 신경쓰는 사람은 죄인이 되었다. 적을 향한 단 하나의 생각 말고 다른 것은 전부 틀렸다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나름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주인공은 밀크맨과 사람들의 압박으로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이 치밀하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만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했다. 그럼에도 진짜 밀크맨, 프랑스어 선생님, 소수의 여성운동자 등 ’반대자’들의 모순을 직면하고 ‘반대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행동 덕분에 주인공은 쓰러질 듯 다시 일어나게 된다.
“안 그러는 사람도 있어.” 내가 반박했다. “어쨌거나 내 삶인데 무슨 상관이래? 루머를 만들어 퍼뜨린데다가 못된 개들처럼 호시탐탐 나를 노리면서 덤벼들려는 사람들한테 왜 내가 해명하고 이해해달라고 빌어야 하냐고.”(343쪽)
“‘무슨 의미가 있나,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게 있나?’ 라는 일반적인 태도와 딴판이라 놀라운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진짜 밀크맨이 음울하고 냉엄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진짜 밀크맨은 지금 나에게 시간을 내주고, 희망을 주고,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고 있었다.” (210쪽)
진짜 밀크맨(우우배달부)는 친절한 이웃 아저씨이며 주인공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부 반대자인 밀크맨으로 오해받아 총을 맞아 병원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서로 나서서 그를 돌보려고 한다. 바로 이어 밀크맨은 사살되었고 진짜 밀크맨의 존재가 더 부각되고 경직된 마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소설의 제목의 밀크맨은 바로 정치적 이유로 사람들을 압박하는 밀크맨이 아니라 적의에 가득찬 사람들까지 품는 ‘진짜 밀크맨’을 말하고 있다.
주인공에게 새 명의 똑똑한 여자 동생들이 있다. 어느 날 ‘물 건너’에서 온 잡지와 신문까지 읽는 모습에 모든 가족이들이 경악한다. 밀고자로 오해 받아 처단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아이들은 ‘저 쪽 사람들 생각이 궁금해서’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한 열살 정도 밖에 안되는 아이들의 이 대답은 소설의 무수한 장면 중에 작은 부분에 속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대립된 상황에서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을 들으려는 태도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첨예한 갈등에 놓인 국가나 공동체도 많고 전체주의적 사고와 행동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모습도 많다. 정치적 이야기만 나오면 두 편으로 갈라지고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는 경험은 일상이 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개인이 모순되고 경직된 현실에 영향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가 좌절하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읽어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의 500페이지 마지막 문장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에 밑줄을 그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주인공이 다시 숨을 쉬고 웃도록 만들어준 진짜 밀크맨과 여러 사람들을 기억하며 나도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