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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진 Mar 28. 2024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 양윤옥 옮김, 청미래, 2023


1. 1952-1969


14p.

피아노를 배운 것보다, 아마 다섯 살 때쯤이었을 텐데, 유치원 창유리에 수채화 그림을 그렸던 일이 더 강렬하게 떠오른다. 투명하고 깨끗한 유리창에 그림물감으로 색칠을 한다는 건 내게 그 유리를 깨버리는 일과 거의 같았다. 내심 '정말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을까?'하고 걱정스러웠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머뭇머뭇 유리창에 색칠을 하고 보니 햇빛에 비쳐서 정말 아름다웠다. 금기를 깨는 데 대한 불안과 그것을 해보는 쾌감, 두 가지가 다 있었다.

20p.

분명 글을 쓰는 일도 그럴 것이다. 어떤 일을 글로 써내려가는 시점부터 이미 좋은 문장인가, 아름다운 문장인가, 힘이 있는 문장인가, 하는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누이의 죽음에 진심으로 비통한 심정을 품었다고 해도, 음악을 만드는 한 음악 세계의 문제로 진입하고 만다. 그것은 실제로 겪은 누이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어서 두 가지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가 생겨난다.

21p. 

표현이란 결국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추상화라고 할까, 공동화共同化라고 할까,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개인적인 체험이나 아픔, 기쁨은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결손감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한계와 맞바꾸어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모종의 통로가 생긴다. 언어도 음악도 문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43p.

그즈음에는 작곡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쯤 소리를 분석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비틀스를 듣고는 하모니가 신기해서 이건 대체 뭔가 하고 피아노를 쳐봤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배우지 않은 음이라서 어떻게 이름을 붙여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것은 9th 화음 - 5화음이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밑음을 도로 하면 도미솔은 3화음, 3도 위의 시를 더한 도미솔시는 4화음, 다시 3도 위의 레를 더한 도미솔시레는 5화음이 된다. 5화음의 가장 높은 음인 레는 밑음인 도의 9도 위(9th)가 된다. - 이었다. 내가 그 얼마 전에 만나서 정신없이 몰두하게 된, 드뷔시가 좋아하던 바로 그 음이었다. 이 화음에 정말 엄청나게 가슴이 뛰었다. 오르가슴 같은 쾌감을 느꼈다.

48p.

결국 도쿠야마 선생님과 마쓰모토 선생님을 찾아가 이번에는 나 스스로 다시 음악을 하게 해 달라고 머리 숙여 부탁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내가 음악을 꽤 좋아하는구나, 라고 실감했다. 그만둬보고서야 깨달았다. 한 번 헤어진 뒤에 다시 만나 결혼하는 연인 비슷한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정말 뭔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내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었다.

51p.

외삼촌의 레코드컬렉션을 무심코 살펴보다가 드뷔시의 현악 사중주 레코드를 발견했다. ... 그 곡은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음악과도 달랐다. 그토록 좋아하던 바흐나 베토벤과는 완전히 달랐다. 비틀스는 물론이고.

곡을 듣자마자 이건 또 뭔가 하고 흥분해서 완전히 드뷔시에게 사로잡혔다. 지나치게 공감하는 바람에 거기에 내 자아가 녹아들었다고 할까,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드뷔시가 바로 나 자신인 양 느꼈다. 드뷔시가 다시 태어나서 내가 되었다는 생각까지 했다.

90p.

아시아 음악이 프랑스까지 가서 드뷔시에게 영감을 주고, 그것이 돌고 돌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아시아의 일개 중학생이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고등학생인 나를 흥분시킨 미니멀 음악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음악과 연결된다. 뿌리는 모두 한데 이어져 있다.

91p.

서양음악사와 개인사를 교차시키면서 문득 깨닫고 보니 나는 작곡의 현장과 동일한 시간 속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음악가들의 문제의식이 나 자신의 문제의식과 겹치면서 만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무렵은 고교생으로서 마지막에 접어든 시기였다. 나는 학교나 사회의 제도를 해체하겠다는 운동에 몸을 던졌지만, 동시대의 작곡가들도 기존의 음악 제도나 구조를 극단적인 형태로 해체하려 하고 있었다. '서양음악은 이미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우리는 종래의 음악으로 막혀버린 귀를 이제 해방해야 한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말 그대로 해체의 시대였다.

 그런 의식이 내 음악으로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한 것은 한참더 나중의 일이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나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원형은 그 무렵에 이미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2. 1970-1977


100p.

그리고 록 콘서트 음악은 곡으로 치면 현대음악을 듣던 귀에는 아주 단순한 곡으로 들리지만 음향으로 치면 무척 재미있었다. 앰프라는 기술을 이용해서 작은 소리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확장된다. 말하자면 청중이 현미경적인 공간에 들어가는 셈이다. 그야말로 존 케이지적인 음향공간이다. 음악에 노이즈를 끌어들였다는 점은 록 음악이 가진 중요한 의미이다. 이것도 록의 존 케이지적인 측면이다. 록이 가지고 있던 현미경적인 성향과 노이즈의 도입, 그것은 나중에 일렉트로니카 -테크노뮤직을 비롯해 하우스, 앰비언트, 트랜스, 드럼 앤 베이스, 인더스트리얼 등으로 다양하게 준류되는 전자음악의 총칭.- 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12p.

난처한 건 내가 연주한 곡이 머릿속에 남아버린다는 점이었다. 한번 머릿속에 들어온 음은 도무지 빠져나가지를 않았다. 긴파리 외에다른 바에서도 피아노 반주를 했지만, 연주하는 곡은 모두 샹송이나 영화음악처럼 대중적인 곡들뿐이었다. 그럼 음악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정말로 힘들었다.

136p.

그렇게 나 자신을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는 상태로 공중에 붕 띄워둔 것은 어떤 예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건방진 데가 있어서, 분명 이렇게 지내다 보면 뭔가 내게 꼭 맞는 삶이 틀림없이 찾아질 것이다, 하늘의 계시 같은 게 내려올 것이다, 하는 자신감이 있었다.



3. 1978-1985


143p.

앞서 말했듯이 YMO의 첫 앨범이 나오기 한 달 전이었던 1978년 10월에 나는 처음으로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일용직 음악 노동자로 밤늦게까지 일한 뒤, 내 기재를 들고 컬럼비아 레코드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간간이 레코딩을 하는 쥐같은 생활을 몇 달이나 계속한 끝에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이었다. 그럼 가혹한 환경에서 창작 활동의 버팀목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생각해보면 역시 "허무한 고용직 노동"의 소모에서 회복되고 싶은 바람이 간절했던 것 같다.

 데뷔 전 2년 남짓은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 여기저기 스튜디오를 뛰어다니며 피아노 연주로 돈을 버는 나날이었다. 매일 녹초가 되어 정말로 노숙자 같은 꼴을 하고 다녔다. 그런 참에 레코드 회사에서 솔로 앨범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해 왔다. 이제 슬슬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명함을 가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어중간한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보여줄 만함 뭔가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145p.

일용직 노동자 같은 일을 계속하면서 속절없이 나이 들어가는 뮤지션도 많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업계에서 점점 지위가 올라간다. 제자 몇 명쯤 거느리고 스튜디오를 낼 정도가 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좀 별로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은 세계에서 골목대장이 되는 식이어서는 끝장이다, 벗어나야 한다, 라는 절박감이 있었다.

153p.

나는 항상 이러저러한 방향성을 품고 살아가겠다는 식의 지표를 애써 피해왔다. 되도록 많은 가능성을 남겨두는 쪽이 좋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런던 공연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해나가도 괜찮겠구나'라는 확신 같은 것을 얻었다.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렇게 나 스스로 분명하게 선택한 건 아마도 그게 처음이었을 것이다.

...

음악을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했다, 라는 건 무엇인가. 민족음악을 연구할 때에도 매우 흥미로운 지점인데, 간단히 말하면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곳의 음악은 아무리 들어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155p.

YMO의 음악은 런던의 청중에게도 "이해되는" 것이었다고 앞서 말했다.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는" 음악이란 어떤 시장에서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품이라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구조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159p.

록 음악의 성향이란 리듬 패턴이나 그루브뿐만 아니라 코드진행에도 존재해서, 결국은 어떤 화음에서 어떤 화음으로 넘어갈 때 엄청나게 록을 느끼는 것이다. 미국에서 연주해본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170p.

그 영화에서 참고한 것은 오케스트레이션이나 멜로디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 음악을 붙이고 어떤 타이밍에 사라지는가, 즉 순수한 영상과의 관계였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지극히 단순했다. 영상의 힘이 약한 곳에 음악을 넣는다는 것. 신비한 분위기고 뭐고 없었다.

179p.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뭔가 힘든 것을 뛰어넘는 과정을 통해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순간에는 대체로 나한테 어려운 쪽을 선택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182p.

곰곰 생각해보면 음악을 만드는 것도 즐기는 것도 두뇌가 하는 일이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음악을 만드는가, 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도 요즘 말하는 뇌과학적안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시 나의 관심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이 앨범에서는 철저히 앙드레 브르통의 자동기술적Automatism 음악 만들기를 시도했다. 햇수로 2년에 걸쳐 거의 매일같이 반드시 스튜디오에 들어갔고, 그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을 적어내려가는 작업을 거듭했다.

 무의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라스코 동굴 벽화처럼 인류가 예술 표현을 시작한 오랜 옛날의 신화적인 것, 집합적인 것과도 이어져 있다.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음악의 형태로 실천해보려고 한 것이다.

 이른바 "오로지 그런 형태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셈인데, 실제로 곡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을 나 자신도 들을 수 있고 타인도 들을 수 있다. 현실의 음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타파해보려고 날마다 스튜디오에 나갔다. 그런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4. 1986-2000


201p.

영화에는 어딘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뛰어넘는 면이 있다. 강한 자력 같은 게 있어서 촬영 현장에서 실제로 사람이 죽는 일도 있다. 현실이니 허구니 하는 것은 일부러 경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만든 말일 뿐, 본디 현실이 허구이고 허구도 현실이고, 그것을 나누는 경계선은 없다.언어의 경계를 뛰어넘는 그런 사실이 영화에 찍힌다.

213p.

YMO 때도 그랬다. 그룹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없는 유형의 음악을 만들어야 했고, 그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나아가 나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키는 일로 연결되었다. 인생에도 예술에도 제약이나 타자의 존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214p.

민족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10대 때부터 오래도록 느껴온 것이었지만, 공동체가 기나긴 시간을 들여 배양해온 음악은 그 어떤 위대한 천재도 따라잡을 수 없다. 모차르트건 드뷔시건 공동체의 음악만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이다.

239p.

뜻밖에도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한 곡은 <Energy Flow>였다. 겨우 5분 남짓한 시간에 쓱쓱 써내려간 피아노 곡으로, 팝이냐 아니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무심코 만들었는데 160만 장이 팔렸다. 그래서 밥상을 뒤엎은 게 옳은 판단이었음을 깨달았다. 대중적으로 하겠다고 고민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별 고민없이 쓱쓱 만듬 곡이 가장 잘 팔리잖아, 라고 생각했다. 그때 <Energy Flow>가 왜 잘 팔렸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ONGAKU WA JIYU NI SURU by SAKAMOTO Ryuichi,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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