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
80p.
해설과 번역은, 성스러운 텍스트라는 나무에서는 영원히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들이고, 세속적 텍스트라는 나무에서는 제때익어 떨어지는 열매들이다.
97p.
운율에 맞게 구상되었으면서 나중에 어느 한 구절에서 리듬이 빗나간 글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다. 그것은 마치 장벽의 갈라진 틈새를 통해 연금술사의 방 안으로 흘러든 빛살이 여러 결정체, 구, 삼각형들이 빛나도록 하는 것과 같다.
100p.
작품은 구상의 데스마스크(Totenmaske)다.
102p.
진정한 논쟁은 한 권의 책을 마치 식인종이 갓난아이를 요리하는 것처럼 애지중지하며 다룬다.
104p.
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온갖 것을 여러 해 동안 따라가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들 자신이 언제나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어슬렁거렸던 곳에서 비대한 몸이 되어 서 있게 된다.
113p.
아이는 꿈속에서처럼 산다. 아이에게는 어떤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아이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일어나고, 자기와 마주치며, 자기에게 닥쳐온다고 생각한다. 유목민으로 보내는 아이의 세월은 꿈의 숲속에서 보내는 시간들이다. 그곳에서 아이는 전리품들을 집으로 끌고 와 그것들을 소독하고 붙박아두고 그것들의 마법을 벗긴다. 아이의 서랍들은 병기창이고 동물원이며, 범죄박물관이고 납골당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치운다'는 것은 샛별들인 가시 달린 밤송이들, 은으로 된 보물인 은박지들, 관(棺)인 집짓기 블록들, 토템나무인 선인장들, 방패인 동전들로 가득 찬 집을 허문다는 뜻이다.
115p.
아름답다고 칭해질 만한 근거가 있는 모든 것이 지니는 역설은 그것이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신경감응 없이 표상이란 없다. 그런데 그 신경감응을 가장 섬세하게 조정해주는 것이 호흡이다. 주문(呪文)의 소리는 이러한 호흡의 규범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음절들을 소리 내며 호흡하면서 명상하는 요가가 행해져 온 것이다.
116p.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138 -139p.
오늘날 사물의 심장을 들여다보는 가장 본질적이고 상업적인 시선은 광고다. 광고는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는 자유공간을 없애버리고 사물들을,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화면 밖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 나오는 자동차처럼, 그렇게 위험할 정도로 우리 앞에 가까이 밀어붙인다.
궁극적으로 광고를 비평보다 그토록 우월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빨간색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전광판 글자가 말해주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아스팔트의 물웅덩이 위에 반영된 그 글자의 붉은 빛이다.
148p.
생각된 그대로 표현된 진실보다 더 가련한 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도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진실은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바란다.
153 - 154p.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는 낮이고 밤이고 물결처럼 우리의 신체기관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이용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이 둘은 그러나 합일될 수 없는 것이다. 소심함과 나태함이 첫 번째 것에 해당된다면 냉정함과 자유는 두 번째 것에 해당된다. 그러한 예언이나 경고는 간접적인 것, 즉 말이나 이미지가 되기 전에 이미 그 최선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예언이나 경고가 지니고 있는 그 최선의 힘이야말로 우리를 그 핵심에 있어 강타하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채 알기도 전에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끔 몰아부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말았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것들은 해석 가능한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158p.
부르주아지의 생활은 사적인 안건들이 지배하는 정권이다. 어떤 하나의 행동방식이 중요하고 심각할수록 그것은 통제에서 벗어나게된다. 정치적 고백, 재정적 처지, 종교 - 이 모든 것은 어디에론가 숨어버리려 하고, 이제 가족은 가장 너절한 본능이 똬리를 틀고 있는 칸막이들과 구석들로 이루어진 부패하고 어두운 건물이다. 속물근성은 사랑의 삶을 철저히 사적인 일로 만들 것을 선포한다.
162p.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 그 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결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말은 취함의 상태에서 우주와 소통하는일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64p.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단지 출산의 도취(Rausch) 속에서만 저 파괴의 광란(Taumel)을 극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