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1952~
124p.
시가 인간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 내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128p.
그런데도 시를 쓰는 한 나는 시인인 것일까? 어쩌면 내 시를 읽는 독자들 중에서, "무슨 시가 이래? 맛있는 살코기는 하나도 달려 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뼈다귀만 남았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영양분이 담뿍 들어 있는 맛있는 살코기를 제공하지 못하는 시인.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불모의 딱딱한 뼈다귀만을 내놓는 시인(혹시나 그 뼈다귀를 푹푹 고아 맛있는 국물이라도 우러나온다면. 제발 그럴 수라도 있다면).
(1989)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난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