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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진 Dec 05. 2023

한밤중의 꽃향기

레일라 슬리마니

<Le parfum des fleurs la nuit>, Leila Slimani, Edition Stock, 2021


11p.

나는 은둔이야말로 생명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소음에서 멀어지면, 그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면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12p.

내가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절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치유하거나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면 안 된다. 오히려 실험실 조수가 표본 병 속에 박테리아를 배양하듯 자신의 슬픔을 배양해야 한다. 상처를 다시 헤치고, 기억을 더듬고, 부끄러움과 이전에 느꼈던 고통이 되살아나게 해야 한다.


13p.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속으로부터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 완전한 자유의 공간에서는 사회적 가면이 벗겨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를 발견하는 일이다.


작가는 아편중독자나 모든 중독의 희생자와 꽤 비슷하게 부작용과 구토, 결핍의 위기, 고독을 잊어버리고 오직 도취만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를 통해 말하기 시작하고 생명이 꿈틀거리는 이 절정의 순간을 다시 체험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18p.

우리 모두는 스스로 포로가 되고 동시에 감시자도 되는 자신만의 금역禁域을, 자신만의 방을 꿈꾼다. 내가 읽은 작가들의 일기와 편지에서는 창작에 도움이 되는 침묵의 욕구가, 고립자의 꿈이 드러난다.


19p.

글쓰기는 부동禁域과 집중을 위한 투쟁이다. 삶에 대한 욕망과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을 끊임없이 억눌러야 하는 육체적 투쟁인 것이다.


22p.

나는 나 자신을 단련하여항상 평정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과 나의 상황과 기원에서 벗어나 활동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나는 이처럼 불편한 삶을 계속해서 살고 있다.


23p.

관심의 과잉, 빛의 과잉은 우리 내면의 어둠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없애버리는 듯하다.


25p.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우리 것이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침묵을 가지고 노는 것이며, 실생활 에서는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문학은 억제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은 침묵의 에로티시즘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43p.

사실대로 말하자면, 소설이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며 나타나 나를 먹어치운다. 소설은 마치 종양처럼 내 몸속에서 퍼져나가서는 급기야 나의 존재 전체를 통제한다. 이 병을 치료하려면 나 자신을 버리는 수밨에 없다. 그런데 과연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글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46p.

내가 아는 많은 작가의 경우, 글쓰기는 자신에게 달리기나 걷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숲이나 큰길에서 조깅을 하고, 하루가 끝나갈 무렵 산책을 한다. 이것은 몽테뉴에서 루소를 거쳐 하루키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고전적인 주제다.


57p.

마르셀 뒤샹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관람자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좋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않은 것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보는 방법을 모르는 관람자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브제가 아니라 그것에서 기인하는 체험이다. 어떤 오브제는 시선의 마법에 의해, 상호작용에 의해 예술작품이 된다.


61p.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밀란 쿤데라가 "육체적 삶의 지루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각했다. 우리의 인체 기능의 슬픔, 맨살의 추함, 병으로 인한 무력함,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더니 결국은 내 일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64p.

물과 눈, 바람은 손의 움푹한 곳에 담을 수 없다. 물과 눈, 바람은 그것들을 가둬두려는 우리의 뜻에 강하게 저항한다. 작가들도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한 줄 두 줄 써나가다 보면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지만, 본질적인 것에는 여전히 접근할 수 없다. 글을 써 가면서 그와 동시에 쓰고 싶어 하던 것을 매번 포기해버리는 것 같다. 글쓰기는 계속되는 실패와 극복할 수 없는 좌절, 불가능성의 체험이다. 그렇지만 계속한다. 그리고 쓴다.


73p.

고등학교 때 철학 선생님은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떠나는 것인 동시에 자기 집을 떠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자신을 떼어놓지 않으면 개별성과 자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가두어놓고 안락하다는 환상을 불어넣는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한 확장하고 정복하겠다는, 그리고 세계와 타자, 미지의 것에 대한 꿈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80p.

과거는 어디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일까? 매우 흔하고 하찮은 사물에도 포함된 기억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이 미술관에 있는 모든 예술가는 이 같은 탐색에 집착하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 유령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래서 그 어느 것도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온 세상이 흉터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모든 예술가는 움직임을 잡아두려는 엄청난 야심을 가지고 있다.


87p.

어쩌면 바로 그것이 예술가의 임무가 아닐까? 잊힌 것을 되살리는 것, 망각으로부터 끌어내는 것, 과거와 현재가 힘들게나마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 것, 매몰되는 것을 거부하기.


93p.

아랍 문화, 특히 시에서는 유목생활의 영향이,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사실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슬람 문화의 요람인 모래와 바람의 풍경은 인간이 흔적을 남긴다고 믿을 때 길을 잃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116p.

사람들은 글을 쓰는 것을 보고報告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증인인 현실을 충실히 보고하는 것이라고. 반대로 나는 내가 보지 못한 것에 대해, 거기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일부를 이루는 사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침묵에 관해 얘기하고 싶고, 기억상실에 저항하고 싶다. 문학은 현실을 재구성 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부분을, 빠진 것을 채우는 데 쓰인다. 파내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꾸며내는 것이 아니다. 상상하고, 추억과 영원한 강박의 조각들을 서로 이어 구성한 하나의 시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127p.

나는 내가 출발한 장소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고, 내가 도착한 장소에서 완전히 살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환승중이다. 두 세계 사이에서 사는 것이다.


128p.

나는 이 영토를 점령했고, 사물의 흐름을 뒤바꿔놓았다. 나는 밤에 살고, 동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 것이다. 나는 책임질 게 없다.


나는 여기에도 있고 동시에 다른 곳에도 있다. 항상 내가 외국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보는 건 싫다. 나는 기만적이다.


129p.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견고한 고정장치 없이, 기댈 수 있는 토대 없이 글을 쓸 수 있느냐 하는 것 이었다. 토양 없이 글을 쓸 수 있을까? 그 어디에도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130p.

“우리는 타락하고 난 이후의 남자와 여자들을 닮았다. 우리는 흑해를 건너온 힌두교도 들이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는 이슬람 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서양세계에 부분적으로 속해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복수적이자 부분적이다. 이따금 우리는 우리가 말을 타듯 두 개의 문화에 올라탔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때로는 두 개의 의자 사이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내 생각에, 교배의 풍요함을 찬양하는 견해도, 그것을 걱정하는 견해도 이중 정체성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것은 불편함인 동시에 자유이고, 슬픔인 동시에 의기양양함이다.

 

134p.

완전히 이곳에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저곳에 사는 것도 아닌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일체의 정체성을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또 스스로가 배신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사는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는 데 성공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대신하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들 이었다.

 

138p.

살만 루시디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숨겨온 이 진실을, 배신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지배당하는 자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저항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집이나 동네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139p.

저녁 아홉 시부터 아침 여섯 시 사이에는 자신을 다시 만들어내는 꿈을 꾸고, 진실을 드러내거나 말하는 걸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의 행위가 아무 결과도 낳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이 허용되며, 실수는 잊히고 잘못은 용서받는다고 상상한다. 밤은 재창조와 중얼거리는 기도, 에로틱한 정열의 영토다. 밤은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 같고, 현실적인 것과 평범한 것이 더이상 우리를 강제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소다. 밤은 자기 마음의 비밀 속에 무수한 목소리와 무한한 세계가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꿈의 나라다.

 

140p.

내 주변에서는 모든 것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거부하는 그 물체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141p.

내가 작가로서의 일을 하기 위해 하는 여행은 모험이나 탐험이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고 폐쇄된 장소에만 있는 여행이다.

 

142p.

역설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어떤 장소에서 떠날 가능성이 있어야만 그 장소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산다는 것, 그것은 유폐와 강요된 부동상태, 무기력의 반대다.

 

150p.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그 누구를 위해서도 말하지 않으며, 그 어느 곳에서도 살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회복하고 싶다. 나는 글쓰기가 내게 항구적인 정체성을 부여할 것이고, 그 어떤 경우에도 나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나를 규정해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생각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게 작가가 된다는 것은 반대로 변경에서 살아가도록 나 자신을 강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나는 내가 무리로부터 쫓겨나 국외자가 되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나는 나를 관통하는 이 부끄러움과 불편함, 외로움의 느낌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낮에도 밤에도 나를 가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려고 섬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주시하고 내가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정을 채우기 위해 섬에 산다.


<한밤중의 꽃향기>, 레일라 슬리마니, 이재형 옮김, 뮤진트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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