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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Oct 15. 2022

발리에서 엽서 보내기

Kantor Pos


 요즘 세상은 참 손으로 글씨 쓸 일이 없다. 얼마 전에 산 편지지를 가방에 넣고 다니는데 쉽게 꺼내지 못한다. 손가락을 탁탁탁 두들기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간단하게 전할 수 있는 세상에서 글자로 마음을 전달한다는 것은 어쩐지 조금 쑥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소꿉동무와는 어린 시절부터 늘 붙어 다녔다. 일 년에 삼백오십일 정도를 함께 하다 보면 사이가 쫌 어색하거나, 서로 생각이 다르거나, 뭔가 고민거리가 있거나 할 때에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연습장을 꺼내서 필담을 나누곤 했다.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 친구 이야기, 교회 이야기, 고민 같은 것들 주제는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졌지만 필담을 나누는 날에는 언제나 연습장 두 세 바닥을 가득 채우고서 "이제 자자.”라고 마무리를 했다. A4 사이즈 연습장 두 세 바닥을 가득 채우다 보면 한두 시간을 훌쩍 넘기게 되는데 글자로 잔뜩 이야기를 나눈 뒤 음성으로 말을 하는 게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글자로 인사를 하고 잠드는 것이다.


 이제 다시 저렇게 연습장을 꺼내서 글자로 마음을 적는 일은 아마도 없을  같다. 이런 놀이를 같이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어려울테고, 그럴  있는 상황을 만들기 이런저런 어른의 사정이 많아진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비주의자 시몬 베유는 다른 대륙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사랑하도록 해요. 이 거리에는 속속들이 우정이 배어 있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멀리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요." 베유에게 사랑은 자신과 친구 사이에 놓인 거리를 메우고 물들인 공기, 그 자체였다. 친구가 나를 찾아와서 내 집 문 앞에 섰더라도. 여전히 무언가는 영영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것으로 남는다. 내가 반기며 다가서서 친구를 끌어안더라도, 그때 내 팔에 감싸인 것은 어떤 미스터리, 알 수 없는 무엇, 차지할 수 없는 무엇이다. 먼 것은 가장 가까운 것에도 스며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는 자기 자신의 깊이조차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요즘,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든다. 친구라는 것은 좋아하는 마음만큼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는 걸까? 자주   없으니 애틋한 마음이 들어서  좋아한다고 내가 착각하는 것일까?


 엽서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엽서는 비효율적인 수단이다. 소식은 메시지로 보내고 근황은 SNS 파악하니 엽서에  써야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대신    되는 짧은 문장 속에 보고 싶은 마음을 함께 담아 우체통에 넣는다. 기능은 없어도 낭만은 있다. 내가 엽서를 보내는 수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특히  씨는 답장을 잘하는 사람이다. 퇴근길 우편함에  씨에게서  엽서가 들어있으면 반가운 마음에 그날 하루 힘들었던 일도 사르르 잊을  있다. 덜렁 세줄 정도 간단한 안부를 묻는  엽서가 일상의  즐거움이다. 코로나 시대에는 그리운 이들에게 엽서 쓰는 것마저 어려웠다. 코로나 초반에 호주로 보낸 엽서가 반송돼서 왔을  깜짝 놀라 우체국에 가서 물어봤다. 당시 호주는 코로나 때문에 일반 우편을 보낼  없다고 했다. 해외에서 오는 것들을  차단해서 엽서조차 보낼  없었다. 2년이 흐른 지금, 엽서는 물론 만나러 가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리가 코로나에 무덤덤해진 것인지 상황이  괜찮아진 것인지 조금 헷갈리지만.


 지난번 어떤 마트에 갔을 때 관광지 사진엽서가 있어서 몇 장 샀다. 다 쓰고 이번엔 우체국에 가서 다른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사야지 했는데 우체국에서도 같은 엽서를 보여주었다. 모두가 같은 엽서를 팔고 있는 게 재미있어서 엽서 판매하는 곳을 발견할 때마다 유심히 보곤 했는데 발리에서는 어딜 가도 관광지 사진엽서를 팔고 있다. 사진에 있는 곳들을 이젠 거의 다 가봤으니 그곳에 함께 가고 싶은 친구들에게 엽서 속 관광명소를 설명하며 운을 띄운다.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오히려 좋다.


엽서를 보낼 곳은 한국 아니면 미국이라서 미국으로 배송 가능한 금액에 맞춰 우표를 샀다. 미국에 보내려면 9,000루피아를 맞춰야 하고, 한국으로 보낼 땐 8,000루피아 우표를 붙이면 된다. 우체통이 어디 있으려나 한참 검색해 봤는데 역시나 이런 건 찾기 어렵다. 발리에서 우체통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많을 리 없다.  숙소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우체국 앞에 있는 우체통에 넣으면 된단다. 이걸 보내려면 다시 우체국에 가야 하는 것이다. (Kantor Pos라는 간판을 내건 오렌지색 건물이 우체국이다.)


 인도네시아 우체통 디자인이 특이하다. 우체통인  모르고 봤으면 그저 거리 조형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우체통이 놓여있지만 엽서는 직원이 직접 받는다. (지금 엽서를 여덟  정도 보냈는데   번도 우체통에 넣어보지 못했다.)  우체통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엽서는 무사히 도착했다. 한국으로 보낸 엽서를 받았다는 사람이 없어서 어디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나 싶었는데 미국으로 보낸 엽서가 잘 도착했다며 친구가 소식을 전해왔다. 얼추 보름 정도 걸린 거 같다. 코로나 시대 배송기간은 예측이 참 어렵다.


 유명한 관광지 사진이 인쇄된 엽서에 마음을 담아 우편함에서 꺼내는 친구들 얼굴을 상상하며 오늘도 우체국 앞 우체통에 간다. 익숙한 내 글씨체를 보며 피식 웃을 거라고 생각하면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난다.


발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수있는 엽서
가루다 공원, 스미냑 해변,빠당바이 항구
오렌지색 우체국과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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