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이던가. 한여름 장마철 어느 날 강남역 한복판에 무릎까지 물이 차던 날이 있었다. 그날은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멎지 않으며 강남역 일대가 대혼란에 빠졌다. 광역버스를 타야 하는 경기도민들이 모여있는 버스 정류장도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로 경계석은 이미 물에 잠겨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강남역에서 일곱 정거장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나는 경기도민만큼이나 상황이 애매했다. 걸어가기엔 무릎까지 차있는 물이 곤란했고 택시를 타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 열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일곱 정거장을 걸어 집에 도착했고 서울 한복판에서 홍수가 날 수도 있구나 하면서 한동안 친구들이 모이면 단연코 그날의 홍수가 화젯거리였다. (그 후로도 강남역은 화제의 침수지역이긴 했지만) 혈기왕성한 동생과 친구들은 지대가 낮은 동네 어귀에서 헤엄을 쳤다고 하던데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지만 사실이었다. 물론 그날 이후로 그 장소에서 다시 수영을 할 만큼 물이 찬 걸 본 적은 없지만 이십 년쯤 전 그날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넷플릭스에서 많이 본 한국 드라마 중 "응답하라 1988"은 꽤 상위권에 있다. 그들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 순 없지만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는 향수가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느낌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도둑을 막기 위해 시멘트 담장 위에 아무렇게나 꽂아둔 깨진 유리병이나, 친척보다 끈끈한 이웃, 가난하지만 행복한 대가족 같은 것들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의 20년 전 모습과 지금 발리 사람들 사는 모양이 많이 닮아서 의외의 장소, 의외의 시간에 향수를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순간들 (내가 이십년쯤전에 겪었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는 순간들) 을 마주치면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발리가 한층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발리는 대략 11월부터 우기가 시작된다. 작년엔 그래도 2,3일에 한 번씩 폭우가 오는 식이었는데 올해는 하염없이 비가 온다. 아침에 쨍하던 하늘은 오후 12시를 지나며 슬슬 캄캄해지고 몰려오는 먹구름 뒤에는 어김없이 폭우가 내린다. 아침나절 쨍한 하늘을 믿고 낀따마니로 출발했다가 비 구경을 실컷 하고 내려오는 길, 안동 (우붓 동네 이름) 골목은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삽시간에 물이 종아리까지 차오른다. 오토바이 위에서 행여 땅에 발이 닿을세라 잔뜩 움츠려보지만 무신경하게 지나가는 옆 차선 차바퀴가 튀기는 물까진 막을 수 없어 끊임없이 비명이 터진다. 우비 하나를 두 사람이 뒤집어쓰고 홍수가 난 골목에서 멍하니 길이 뚫리길 기다리자니 위에서 별게 다 떠내려온다. 축구 공부터 양동이 짜낭사리들까지. 배수가 잘 안 되는 와중에 길가에 쓰레기가 잔뜩 널려있으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종아리까지 물이 차는 건 순식간이다. 답답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그래, 오늘 아니면 내가 언제 오토바이 위에서 달달 떨면서 구정물에 발을 담가보겠어! 하며 마음을 바꿔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