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쟁이 섬이 내게 준 선물
24.03.04.MON
섬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그만큼 다양한 하늘을 하루동안 볼 수 있다.
아침을 일찍 시작하니 하루가 길다.
조식을 먹고 운동을 다녀왔다. 주위를 돌아다니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과 꽃잎을 주워왔다. 어릴 땐 그저 모아두다가 결국 다 상해버려 버리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진흙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물과 함께 냄비에 넣었다. 오전 내내 색을 우려내면 마치 보리차 같은 색이 나온다. 학부 시기에는 시간이 없어 믹스커피 가루로 대체 했었는데, 시간이 많으니 이렇게 안료에도 공을 들일 수 있어 좋다.
오후 1시에는 숙소 스텝분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원래 작가는 객실에서 혼자 식사를 해결하는게 통상적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대표님께서 직접 떡만둣국을 끓여주셨다. S작가님과 P작가님께서도 오셔서 같이 드셨다. 내일은 두 분과 함께 세화 오일장에도 구경 가기로 했다.
점심 먹고 돌아오니 우려놓았던 나뭇잎물이 한 김 식었다. 그릇에 덜어내고 새로운 풀들을 넣어 2차로 우려냈다. 그냥 천에 발라도 염색이야 되겠지만, 좀 더 발색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백반을 조금 갈아 넣었다. 백반을 막자사발에 간 뒤 한 김 식은 물에 넣으면 더 잘 녹는다.
토요일에 화방에서 사온 나무 왁구에 천을 고정했다. 마무리까지 공들이면 쭈글쭈글하던 천이 아주 판판해진다. 종이도, 천도 그림 그리기 전 화판이나 왁구에 고정할 때가 제일 좋다. 구겨진 종이와 천이 쫙 펴질 때 내 마음도 쫙 펼쳐진 것 같다. 무엇을 그릴 지 아이디어와 의욕도 샘솟는다.
백반을 넣은 풀물을 처음 도포하니 천 위에서 물끼리 뭉친다. 아마 천에 나도 모르는 코팅 작업이 되어 있던 모양이다. 그래도 붓으로 몇 번 지그시 눌러가며 발라주면 천에 잘 스며든다. 판매하는 안료가 아닌 완전히 자연에서 얻은 천연 재료로 염색하는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색감이 잘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색이 잘 나왔다.
편안한 분위기의 갈색이 제주에도 잘 어울린다.
어떤 이는 바다의 푸른 색을, 어떤 이는 유채꽃의 노란 색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내가 제주에 도착해 받은 첫인상은 풀내음 가득한 갈색이었다. 따듯하고 포근한 색감이다.
안료를 만들고, 왁구에 천을 매는 작업이 생각보다 체력과 힘을 많이 요하기 때문에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나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가보려 했는데 날이 어두웠다. 비가 오고 있었다. 롱패딩도 입었고, 평소 우산을 깜빡해 비 맞는 날이 종종 있었기에 그냥 나가려고 했더니, 로비에서 숙소 스텝분들께 붙잡혔다. 지금 날씨에 우산도 없이 그냥 나가면 감기 걸린다며, 당사자인 나보다도 나를 훨씬 더 걱정해주셨다. 우산을 빌려주셨다.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버튼 우산이었다.
천이 다 마르고 2차 도포를 진행했다. 교수님께서는 작업 기록을 틈틈히 하는 습관을 기르는게 좋다고 하셨는데, 영상을 한 번 찍어볼까 하다가 계속은 못하겠단 생각을 했다. 매 번 SNS에 영상을 편집해 올리는 사람들은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시간이 은근 빠르게 간다. 벌써 제주에 도착한 지 4일 째 되는 날이다. 새로 넣을 공모까지 열흘밖에 남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는 부지런히 작업에 몰두할 생각이다. 물론 오전에 오일장 구경부터 다녀올거다. S작가님께서 오일장에 맛있는 떡볶이집이 있다고 추천해주셨는데, 떡볶이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아주 기대되고 설레는 일이다.
제주에 있는 한 달을 그냥 흘려보내기 싫어서 기록해두고, 일기도 쓰고, 사진도 찍고 있다.
문득 일상과 시간을 그저 흘린 지난 날이 생각났다.
제주에서의 생활 못지 않게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돌아가서도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