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식을 먹지 않았다. 어제 휴대폰에 있는 옛날 사진을 구경하느라 너무 늦게 잤기 때문이다. 그래도 9시 10분에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했다. 오전에 세화 오일장을 구경하기로 약속했다. 로비에서 11시에 모이기로 했지만, 단체 톡방에 올릴 말씀도 읽고, 풀물을 한 번 더 발라두고 싶어 침대 속 뒹굴거리기를 미뤘다.
세화 오일장은 숙소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했다. 5일, 10일, 15일 이렇게 열리는 것으로 들었는데, 큰 건물 안에 장이 열려서 여기저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나는 거기서 빨간 바지와 검은 후리스를 얻었다. 빨갛고 두꺼운 바지는 스판 재질에 흰 줄무늬가 포인트였다. 아주 따듯하고 편한 바지다. 후리스는 겨울에 롱패딩을 입기 애매한 순간(롱패딩을 입기에는 덥고, 입지 않기에는 추운 실내라던지)마다 생각났는데, 바쁘게 지내다보니 깜빡 잊고 사지 못했다. 제주에서 지내는동안 입기도 하고, 돌아가는 날에도 입고 비행기를 탈거다.
빙떡을 처음 봤는데, 엄청 얇은 반죽에 무채를 넣어 만든 음식이었다.
먹어보진 못했다.
가보기로 했던 떡볶이 맛집은 아주 가끔 문을 닫는 날이 있는데, 하필 그게 오늘이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다음에 와서 먹기로 했다. 기회가 여러 번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된다. 소소한 떡볶이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나름 중대한 도전까지 모두 말이다. 한 번 실패한다고 영원히 끝은 아니다.
떡볶이 대신 청국장 맛집을 갔다.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조식을 먹지 못했더니 조금 출출했다. 청국장과 보리밥이 9,000원이었다. 양도 많아서 겨우겨우 다 먹었다. 아마 조식을 먹었다면 남겼을지도 모른다.
제주는 주민분들이 따듯하다. 2일에 편의점에서 짐이 많아지자 마치 엄마처럼 이렇게 들고 가야 한다고 30분이나 걸어야 해서 어떡하냐고 사장님이 걱정해주셨고, 오늘은 장에서 여러 상인 분들이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해주시고, 청국장 집에서는 짐이 많으면 다른 곳에 둬도 안가져간다고 농담도 해주셨다. 대표님은 일 없으면 계속 여기서 살아도 된다고 농담 반 진담 반 말씀하셨다. 마음 같아선 낯에 철판을 깔고 제주에 눌러 살고 싶었다. 넓은 제주 땅에서 나 하나쯤 일꾼으로 받아주는 곳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성남이 그리웠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가게에 들러 작은 액자와 디퓨저를 샀다.
안에서 음식을 해먹는데 요근래 계속 비바람이 많이 쳐서 환기가 어려웠다.
꿩 대신 닭이 아닌, 환기 대신 디퓨저다.
작은 액자 안에는 드로잉을 넣을 생각으로 하나 샀다.
바로 옆 방인 S 작가님 객실에 구경도 다녀왔다. 몇 주 전에 오신데다가 4월 초까지 꽤 길게 계시는 분이라 벌써 여러 작업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벽에는 드로잉이, 커튼에는 천에 그린 먹작업이 걸려 있었다.
나는 최소 4점만 생각하고 왁구만 몇 개 짰는데, 작은 왁구를 더 사올걸 그랬다. 그치만 나도 나대로 한 달 조금 덜 되는 시간동안 자수 작업을 잘 마무리하면 된다.
공모 선정 작가는 모두 그림만 보고 뽑으셨다고 했다. 다른 이력이나 경력은 안보시고, 포트폴리오만 며칠 내내 보시며 뽑으셨다고. 작가에게는 그 말이 가장 큰 칭찬이다.
'작가님은 그림 그릴 사람이니 계속 그리라고, 그림만 본 것이니 여기 뽑힌 것에 프라이드를 가져도 좋다고, 아마 나중 되면 분명 잘될거라고' 대표님께서 용기를 주셨다. 최근까지도 작업을 지속할 지에 관한 고민이 꽤 많았는데, 정말 감사했다.
로비에서 발목을 살짝 접질러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너무.. 너무 창피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민망해서 호다닥 엘레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들어왔다.
제주 생활에 적응하며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몰려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간단하게 해먹고 나니 Y에게 답장이 와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얘기 하다가 카페를 하나 추천 받았다. 다소 생소한 이름이었다. 말차 빙수가 맛있다고. 이후에 엄마가 제주로 오시면 함께 먹어봐야겠다.
드디어 자수 작업을 시작했다. 아직 초반이라 속도가 잘 안나기도 하고, 헤매는 부분도 있었지만 내일부터는 좀 빨라질 것 같다.
오늘은 자도자도 졸리다.
지금도 또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