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6.WED
제주 바람은 거칠지만 매력이 있다.
맞이할 때에는 너무나 거세지만 걷다보면 바람 생각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지 못하니 몸이 굼떠지는 것 같아 산책을 좀 했다. 늦장을 부린 탓에 조식 마감 시간에 간신히 맞춰 세화당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모든 분들이 느닷없이 나를 향해 박수를 쳐주셔서 당황했다. 알고보니 어제 세화 오일장에서 산 바지가 잘 어울린다는 의미로 쳐주셨던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작은 나에게 이런 영화같은 하루하루가 허락되다니 참 감사하다.
조식을 먹은 후에는 계속 작업을 했다. 풀물이 켜켜히 쌓인 캔버스를 보니 자수를 놓고 싶을 뿐이었다. 사실 잠도 많이 와서 2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혼란스러운 꿈을 꿨다. 꿈에 나오길 바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반가웠다. 하지만 장면은 휙휙 바뀌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호텔에서 갑질을 당한 것이었다. 지금 묵고 있는 숙소가 아닌 해외의 호텔이었다. 객실 카드키 호수가 바뀌어서 프론트로 갔는데, 직전의 엄청난 부자 고객에게는 깍듯했지만, 나에게는 차갑게 대하던 직원의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 하더니 딱 그 모양이다.
일어나니 점심 시간이어서 간단히 해먹은 뒤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캔버스 4개 중 3개에 흰색 실로 자수를 넣었다.
저녁을 먹은 뒤, 대표님께서 초대해주신 스텝 환영 파티에 느즈막히 참가했다. 내일 본가로 돌아가시는 분부터 오늘 막 도착하신 분까지 다양했다. 학교 졸업 후에 오신 분도 계시고, 대학 중퇴 후 이것저것 하다 오신 분도 계시고, 휴학한 뒤 오신 분도 계셨다. 모두 차분하신 분들이어서 얘기를 잇는 데에 어색했다.
다행히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고 자기소개도 했다. 부끄럽지만 화가로 이곳에 와있으니 작업 소개도 했다. 나의 본업은 작업과 작품 소개로 요약된다. 작업은 정말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잘하고 싶은 욕심도 많다. 그렇기에 작업에 대한 공부를 하러 대학원도 갔다. 하지만 작품 소개는 언제나 머쓱하고 부끄럽다. 작업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타고난 성향이 지극히 내향적이어서 그렇다는 점도 잘 안다. 즐겁고 잘 하고 싶은 작업을 오랫동안 하기 위해 나의 성향을 뛰어 넘어 도전해야할 것들이 산더미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만큼 그림이 좋다.
체크인 고객이 있어 자리를 비우신 대표님께서 오시고 옆 방에서 지내시는 S작가님도 함께 자리를 이어갔다.분명 만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재미난 대화도 많이 하고 친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체크인 직후부터 드는 생각이지만,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순간이 그리 무섭고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위해 무수히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도. 나에게 다정하고 세심하게 챙겨주시는 리조트 관계자분들부터, 한참 어린 애기 작가, 막내 작가라고 아껴주시는 작가님들,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육지에서 왔다고 하면 초면임에도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주민분들까지. 도시에서 혼자 아등바등 버텨온 시간이 생각났다. 그리고 아직 육지에 있을 오랜 인연들이 내게 얼마나 다정한 배려를 해주었는지도 떠올랐다.
얘기를 마치고 객실로 돌아가는 길에 S작가님께서 '계획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지금 생활을 더 경험하면 좋은 작업이 나올 것 같다.'는 피드백도 주셨다. '앞으로의 작업이 기대된다.' 는 말씀도 해주셨다. 나는 작업에 있어서 평소보다 더욱 강박적인 성향이 있는 편인데, 작업 스케줄에 있어서 더 그렇다. 그런 부분을 짧은 대화만으로도 캐치해주셨던 모양이다. 그동안 용돈이라도 스스로 벌겠다고 작업, 공부, 파트타임을 병행하느라 바쁘게 살며 잊었는데, 나도 그림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나의 작업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건설적인 조언을 주시는 것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런 시간을 보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한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