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맑았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조식을 먹은 뒤 오전 내내 작업을 했다. 자수를 놓으면 머리를 어지럽히던 잡념이 모두 사라져서 좋다. 손이 느린 편이라 시간 대비 효율은 좋지 않다. 손가락 세 개의 두 마디 면적을 채우는 데에 2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작업은 효율 따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점심에 대표님이 닭볶음탕을 해주셔서 점심을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인데 정말 맛있었다. 닭볶음탕만 파는 집을 여셔도 맛집이라고 금방 소문날 정도였다. 레시피를 물어보니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고추장, 쯔유, 참치액, 간장을 넣어 만드셨다고. 아마 같은 방법으로 내가 만들어봐도 대표님이 해주신 맛은 안날 것 같다. 손맛이란게 있으니 말이다.
2시에 대표님과 S작가님과 셋이서 액자집을 다녀왔다. 작품들이 완성되어 객실에 전시하고 투숙객이 이용하다보면 혹시 모를 파손의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와서 작업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어젯밤에 두 분과 얘기를 나누며 깨달았다. 제주에 있는 표구집들을 찾아 견적을 냈다. 처음 가본 곳이 가장 저렴하고 사장님도 친절하셔서 그곳으로 결정했다.
다른 작가님들 작업까지 합하면 5-60점 정도 맡길 예정이라 괜찮은 곳에서 거래하는게 중요하다. 다행히 사장님께서 진중하시고 가격도 굉장히 저렴했다. 대표님께서 좋은 거래처를 알게 되어 기쁘셨는지 오는 길에 해산물을 사주셨다. 표구집으로 가는 길에는 찹쌀 꽈배기를 사주셨는데, 올 땐 더 큰걸 먹여주신다. 아마 여행으로 왔으면 전혀 몰랐을텐데, 현지에 오래 사신 분이 추천해주셔서 그런지 괜찮은 맛집을 많이 가게 된다. 가서 해삼과 멍게 먹기를 도전했다. 도전은 성공이었다. 바다맛이 나서 좋았다.
나의 삶은 낭만이라던가 청춘이라던가 하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삭막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주에 와서는 여태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낭만적인 순간을 마주한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바라보는거다.
해녀집에서 대화를 나누며 작업 이야기를 하다가 깨달았다.
사랑하는 장소도 시간을 두며 구경도 하고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풍경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겨 생각날 때마다 꺼내본다.
사랑하는 책은 절대 빌리지 않고 반드시 구매해서 여러 번 들여다보고,
마음에 드는 글귀는 따로 적어둔 뒤 스칠 때마다 멈춰 바라본다.
사랑하는 공부와 그림도 그냥 계속 보기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바라보고, 사진과 영상을 꺼내본다.
그래서 우리 가족, 특히 엄마랑 할머니 영상과 음성 녹음은 반드시 핸드폰 안에 저장한다.
어릴 때도 그랬다.
가지고 싶은데 살 수 없던 장난감은 판매대에 놓여져 있는걸 하염없이 보다가 돌아왔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 그냥 많이 보면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 땐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은 시간이 지나면 생각도 나지 않게 되니 말이다.
어떤 점이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과 S작가님께서 나를 많이 챙겨주셔서 참 감사하다.
아마 작가님들중에 막내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무언가 책임질 일도 많았고, 집에서도 장녀 역할을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막내가 되니 어색하다. 좋은 말들을 많이 해주셨다. 대표님은 내게 '일과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좋지만, 덜 심각할 필요가 있다.' 고 하셨다. 진지한 사람인 것 같은데 무게가 있는 것도 좋지만 즐기면서,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라고 하셨다.
객실에 틀어박혀 작업만 하지 말고, 놀기도 하고 연애도 좀 하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명절에 같은 말을 들었는데도 그 때와 달리 웃음만 나왔다. 나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때가 되면 나타날거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무거운 짐은 내려두고, 좀 더 천천히, 여유롭게.
풍부한 일상을 살아서 좋다.
액자집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와 연락을 좀 했다. 우리 여사님께서 11일부터 14일까지 제주에 묵으실 예정이니, 비행기표와 렌트카를 같이 보고 객실 예약을 잡아뒀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 공모 준비는 잠시 접어뒀다. 14일이 공모 마감일이다. 이전 같았으면 기를 쓰고 밤을 새서라도 10일 안에 모든 작업과 서류를 마쳐 보냈을텐데, 지금은 그냥 작업이 나오면 쓰고, 아니면 다음을 기약하자고 마음 먹었다.
분명 제주에 일하러 왔는데 노는 생각만 더 는 느낌이다.
돌아오니 저녁 시간이 다 됐다. 회로 배를 채우니 졸려서 자고 일어났다. 객실이 어둡고 조용했다.
성남에서는 이 적막을 바랐는데 오늘은 기분이 이상했다.
유난 떨 것은 없다.
이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감정은 사라지고 결과는 남는다.'는 말을 좋아한다.
조금만 참으면 결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따라가면 그 뿐이다.
물론 종종 다른 곳을 볼 때도 있고, 힘들어서 넘어질 때도 많지만,
다시 일어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