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고, 밥은 먹었니?

24.03.08.FRI

by 이헤윰

어제 잠들기 전 C와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학교 얘기를 해서 재미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같은 학교인 친구를 만나면 얘기할 것이 많아진다. 학부 때 공부와 파트 타임만 생각하느라 동아리 하나도 못해보고 졸업한게 문득 생각났다. 앞으로 계속할 공부 때문에 고민이 있어 보여 거의 처음으로 깊은 얘길 했다.


전공에 상관없이 대학원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나는 내가 공부한 분야가 그나마 대학원을 졸업하기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C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몇 마디 얹었는데, 말하면 할수록 '나나 잘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하다보니 길어져 나의 대학원 입학이 늦어진 이유도 얘기하고, 학부 때 개인적으로 스스로에게 아쉬웠던 점도 얘기했다.

휴학도 고민중이라고 했다. 놀아도 된다고 했다. 나도 1년 동안 휴학해서 여행갈 돈 모으고, 헬스 운동 하고, 여행 다녀오며 놀았다고 했다.


휴학이란 것이 쉬려고 하는 것 아닌가, 방학도 쉬려고 있는거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방학 때에는 무조건 놀았다. 계절학기도 일절 듣지 않았다.


학부를 다닐 당시에 나에게는 파파고가 아주 혁신적인 툴이었는데, 요즘은 챗GPT를 안쓰는 학생이 없단 얘기를 들었다. 석사 과정 한창 공부할 때만 해도 챗GPT가 나오기 전이어서 해외 논문과 자료를 사전 끼고 해석했는데, 좀 더 일찍 나왔으면 참 좋았을거 같다. C에게 간단하게 어떻게 사용하는지 듣고, 이번에 지원할 해외공모 서류를 챗GPT와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역시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평생 배움이 즐겁다.


피곤했다.

눈은 아침에 떠졌다.

전에 제주는 바다가 가까워 산소가 많아 공기가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언제 자도 눈이 아침에 떠진다. 집에 돌아가면 방 공기도 신경을 좀 써야겠다.


조식을 먹은 뒤 객실에서 드로잉을 했다. 에스키스도 거의 암호 수준으로 그려놓고 계획이 세워지면 본작업에 들어가는 편이라 익숙치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풍경 사진을 보고 펜으로 하나하나 그렸다. 드로잉 습관이 잡혀있지 않아 결과물이 처참했다. 이걸 액자까지 해서 객실에 걸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래도 같은 풍경을 여러 번 그리다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편의점에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사러 걸어갔다. 겁도 없이 롱패딩도 입지 않고 갔다. 막상 편의점에 가니 제주는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팔지 않았다. 티머니 카드를 통에 꽂고 처리한다고 하셨다. 약간 허탈했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았으니 됐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거의 바람과 힘겨루기를 하며 걸어왔다. 운동 쉬기로 해서 산책 겸 나간건데, 온몸 운동을 한 느낌이다. 그래도 오는 길에 들른 골목에서 아름다운 유채꽃밭을 만났다.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보물이 하나 더 늘었다.


제대로 뭔가 한 것도 없는데 오후 3시 반이 지나있었다. 하지만 진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하고 낮잠을 잤다. 2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제주에 와서 너무 쉬기만 하면 알람 없이 못 깰 것 같아 걱정했는데,

알람이 없어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알람이 없어도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알람이 없어도 같은 시간에 낮잠을 잔다.

참 신기하다.


평소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둔 탓에 어머니와 카페 점장님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어머니와는 통화를 길게 할 것 같아 점장님께 먼저 전화를 드렸다. 일요일 카페 일을 부탁하시려다가 내가 제주에 와있는게 뒤늦게 떠오르신 모양이었다. 3월에 돌아가자마자 31일 오전 타임 알바를 들어가기로 했다. 4월에는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전 일을 한다.


곧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마침 저녁 시간대라 그런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들은 소리는 '밥은 먹었니?'였다.


참 한결같다.


열아홉 때에도 부모님은 '공부 언제 할거니.', '원하는 대학 갈 수 있겠니.' 라는 말은 일절 없으셨다. 1년 내내 '밥 잘 챙겨먹어라.', '잠 좀 자면서 공부해라.' 라는 말만 하셨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소리를 듣는다. 20대 후반이지만 부모님에게 나는 여전히 어리숙하고 걱정되는 딸이다.


어머니가 제주에 묵으실 날에 맞춰 공항 버스 왕복을 예약해두셨다. 렌트카 운전자 등록을 위해 면허증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다. 작업 하느라 바쁜데 엄마와 여행한다고 시간 뺐는게 아닌가 말씀하시길래 괜찮으니 가고 싶다고 하신 곳 알아보겠다고 했다. 작업 스케줄이야 오시는 기간에 맞춰 조정하면 되는거고, 여기서는 남는게 시간이니 언제든 작업 하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와 함께 제주에서 보내는 시간이었다. 비행기 타고 오시면 피곤하실테니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내가 운전해서 모실 생각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다 받을거라 말씀하시는데, 일단 지금은 돈을 못버니 운전기사라도 하는게 마음이 편하다.


피곤이 풀리지 않아 대충 저녁을 때우고 성경을 읽었다. 여러 왕들의 행적을 보았지만, 매 번 느끼는 점은 한 가지다. 교만이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인 힘을 가졌는지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두렵다. 지금 내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사실 교만한데 스스로가 아둔해서 교만을 알아채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방심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내일은 밖에 나가지 않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작업에 집중 해야겠다.

물론 챗 GPT도 탐색해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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