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실컷 운 덕에 늦잠을 잤다.
조식 마감 시간은 오전 9시 10분인데, 딱 10분 늦은 9시 20분에 눈을 떴다.
매일이 그렇지만, 오늘은 더욱 선물같은 하루였다. 주님은 어제 나의 눈물을 아셨는지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제주에 도착한 이래 가장 맑은 날씨를 허락하셨다. 바람도 잔잔하고, 구름이 새하얗게 하늘에서 부유했다. 작가님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에 날이 좋으니 나가자는 연락도 와있었다. 바로 일어나 준비를 마친 뒤 나갔다.
오늘은 10일이어서 세화 장이 열리는 날이다. 전에 먹지 못했던 떡볶이 맛집이 문을 열었다. 오래된 맛집이어서 그런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점심도 먹어야 하고, 작가님들과 나 모두 소식가라 2인분을 시켜 나눠먹었다. 이전까지는 우리 동네에 있는 즉석 떡볶이집이 최고였는데, 가래떡 떡볶이가 가장 맛있는 집을 찾았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시장 안에서는 휴대용 카세트가 너무 귀여워 사진을 찍었다. 브랜드 이름이 효디오였다. 쑥 호떡도 하나 사서 넷이 나눠먹었다. 혼자 다 먹기엔 많은 양이었는데, 넷이 나눠먹으니 딱 좋았다. 여기 와서 조식을 먹지 못한 날이 총 이틀인데, 그 이틀 모두 점심에 아주 맛있는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장 구경을 마친 뒤에는 키위농장 옆에 있는 갤러리를 방문했다. J 작가님의 친구의 친구분이 개인전을 여셔서 갔는데, 좋은 작업들이 많이 걸려있었다. 시선에 관한 내용이 적힌 작업노트도 있었다. 보통 화이트큐브 갤러리에 깔끔하게 작업을 디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갤러리는 벽이 OSD 합판으로 되어 있어 자연스러운 느낌이 이색적이고 좋았다. 갤러리 대표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알고보니 개인전 중인 작가님께서 처제 되시는 분이셨다. 대표님 또한 키위 농사를 겸해 조각 작업을 하셨다. 갤러리 바로 옆 컨테이너에 있는 작업실도 구경 시켜주셨다. 용접 테이블과 가지각색인 공구들이 벽에 작품처럼 멋지게 걸려있었다. 공구들을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공구 모으기가 유일한 취미다. 분명 이 벽을 보면 한동안 떠나지 않고 이것저것 만지작 거리셨겠지.
다른 한 곳에는 유토로 조각 중인 작업들도 있었다. 유토는 쉽게 말해 기름이 섞인 흙이다. 나로써는 자주 접하지 않았던 재료다. 작품의 반질반질한 표면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작업에서 평면을 주로 다루다보니 입체 작업실을 볼 일이 드문데, 이번 기회에 새로운 분도 알게 되고 예기치 못하게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제주에서 오래도록 사는 삶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도 들을 수 있었다. 크게 날씨와 교통편에 관한 부분이었다. 언젠가 제주에서 오래도록 살게 된다면, 자동차와 건강, 이 둘은 꼭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키위 나무의 실제 생김새를 보았다. 키위나무에도 암수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다음 장소는 교래 자연휴양림이다. 제주도민은 무료 입장이었고, 이외의 관광객은 입장료가 1,000원씩이었다. 아주 저렴한 입장료와 달리 내부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무 뿌리가 드러난 판근현상(Buttress Roots)에 대한 안내도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돌과 나무에 이끼가 피어있었고, 고사리가 땅을 빽빽히 수놓아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해가 쨍한 오늘도 그랬는데, 새벽에 안개가 내려앉거나 비 온 뒤 이슬 맺혔을 때 걸었다면 더 환상적이었을 것 같다. 긴 코스와 짧은 코스가 있었다. 우리는 40분 정도 소요되는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점심은 몸국 정식을 먹었다. 나는 매생이국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몸국도 몸이라는 해초류로 만든 국이어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수육도, 멸치 조림도 모두 맛있었다. 그동안은 여행 오면 맛집을 가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오늘 알았다. S 작가님은 정말 섬세하고 좋으신 분이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성품과 더불어 단단한 중심이 있으신 분이다. D 작가님은 순수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맑고 재밌으신 분이다. 쾌활한 성격으로 얘기를 많이 해주시는데 오늘부터 날 놀리는 데에 재미를 붙이셔서 더 웃겼다. J 작가님은 만난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친근하게 대해주신 분이다. 평소에는 차분하시지만 관심사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얘기와 탐구를 하신다.
작가님들은 모두 겸손하시고 중심을 굳게 지키시며 소탈하고 따듯한 심성을 지니셨다.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 매일을 충실히 지내며 마주하는 것들을 진심으로 대하시는 모습이 멋졌다. 나는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니 겸손함을 지키며 진실된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꿈을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배불리 먹은 뒤 용눈이 오름으로 향했다. 이동 내내 J 작가님께서 운전해주셨는데, 정말 감사했다. 피곤하실까 걱정 되었는데, 이동 시간이 짧막짧막 해서 괜찮다고 해주셨다. 오름으로 오르는 길은 20-30분 정도로 비교적 짧았다. 하지만 중간 정도 오르는 순간 옆의 풍경을 보고 주저 앉을 뻔 했다. 나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정말 무서워 하는데, 풍경 사진을 찍겠다고 방심한 사이에 아래로 깊이 파인 숲을 봐버렸다. 길은 충분히 넓어 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난간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 볼 수 없었다. S 작가님께서 너무 힘들면 그만 올라가자고 하셨는데, 옆을 보지 않으면 괜찮아 끝까지 올라가도 좋다고 답했다. 그 구간은 땅만 보거나 반대편 오름벽을 보며 걸었다. J 작가님은 아래가 푹 파인 장면을 높은 곳에서 보면 마치 그곳이 자신을 빨아들이는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느냐 물어보셨다. 정확히 내 기분이었다. J 작가님도 비슷한 느낌을 받으신 모양이다.
강원도 가족 여행 때 밑이 투명한 흔들다리를 어거지로 갔다가 오열하며 건넌 얘기도 하고, 제주도 가족 여행 때 성산일출봉에 열심히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애를 먹었던 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무사히 다녀왔고, 오늘 용눈이 오름도 무사히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D 작가님과는 가족 얘기를 하며 웃었다. 우리 아버지는 유쾌한 성품이셔서 장난을 많이 치신다. 나는 울면서 장난 치는게 싫다고 하면 아버지가 당황하며 다시 안하신다 하니 웃음을 터뜨리셨다. 작가님들 중에서 내가 제일 키 큰데다가 다 큰 성인인데 울면서 하지 말라고 얘기하면 아버지가 적잖이 당황하셨을거 같다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아 머쓱하다가 너무 웃겼다.
휴양림과 오름을 걷던 중 만난 꼬불꼬불 나무 울타리가 대체 왜 있는지 우리 모두 여행 내내 궁금해 했다. 오름에서 내려온 뒤 휴게소 직원 어르신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말을 방목시켜 울타리 윗쪽에서 먹이를 주었는데, 지금은 말들을 이동시키고 울타리만 남았다고 하셨다.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어 재미있는 하루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해안 도로를 따라 왔다.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양옆으로 줄지어 말들도 보였다. 비율 좋은 서양말들이 많았다. S 작가님께서 토종말은 못난이라며 웃으며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다리는 짧고 얼굴은 크고 눈을 쪼꼬매서 너무 귀엽고 웃겼다. 서양말에 비해 못나 보일진 몰라도 내 눈엔 너무 귀여웠다. 나도 나의 못난 점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닷길을 따라 달리다가 S 작가님의 돌고래 발견 얘기를 듣고 잠시 꺾어 해변가로 들어갔다. 작가님 말씀대로 정말 돌고래가 무리 지어 헤엄치고 있었다. 파도 사이로 돌고래의 등이 보였다가 안보였다가 하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마치 오랫동안 봐달라는 듯 우리가 서 있던 해변을 왕복해서 지나다녔다. 돌고래를 직접 본 것은 살면서 처음이라 너무 신기했다. 원없이 영상으로 남기며 돌고래를 구경했다. 오늘 참 알찬 하루를 보내서 마지막으로 돌고래만 발견하면 아주 완벽한 하루일거라고 넷이서 얘기했는데, 정말 돌고래가 딱 나타나서 신기했다.
나는 그것이 주님의 선물인 것을 알고 있다.
주님이 아름다운 오늘을 허락하시고, 완벽한 하루를 선물해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숙소로 돌아와 인사를 나눈 뒤 객실에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돈했다.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였다. 기도로 준비하고 온라인 링크를 열었다. 주님은 어제 살 소망이 없던 과거를 떠오르게 하셨고, 주님 은혜로 회복시키신 은혜 또한 떠오르게 하셨다. 오늘 설교 말씀 제목은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이 피다.'였다. 죽은 나무에서도 싹을 틔우시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듣고 감사함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예배 후 사진과 영상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매일이 소중하고 특별한 시간이지만 오늘은 평생 잊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