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5.FRI
시간이 참 빠르다. 벌써 제주에 온 지 보름이 됐다.
주말에 비 소식도 있고, 그동안 많이 돌아다니며 작업 소스를 모았으니, 내일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객실에 있을 것 같다. 분명 큰 용기를 가지고 가지치기를 여기저기 한 것 같은데, 아직 생각할게 많다. 정확히는 집으로 돌아간 후의 것들 생각이 많다. 맡겨주신 사역과 단기선교 준비, 4월동안 진행되는 대학원 입학 시험, 5월에 진행되는 서울 페어, 6월에 아마도? 참가할 기획전, 7월에 가게될 캄보디아 단기선교까지. 3월에 놀고 먹는 이 생활이 뭔가 올해의 마지막 만찬 같은 휴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조식을 먹으며 작가님들과 오일장에 가기로 했다. 포틀럭 파티에 떡볶이를 사간다고 했다가, 오늘 장 서는 날이라 떡볶이 먹으러 가야 한다는 흐름이 되었다. 떡볶이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한 것 뿐인데, 장 서는 날에 떡볶이 먹으러 가는 것이 하나의 코스가 되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날이 어제보다 더 따듯했다. 챙겨온 셔츠를 처음 꺼냈다. 지난 번에 보지 못했던 꽃들도 진열대에 놓여있었다. 작가님들께서 우스갯소리로 꽃을 좋아하면 나이 든거라고 하시던데, 나도 좋아한다고 어필했다. 마침 꽃무늬 조끼도 입고 있었다.
유채동지 겉절이도 5000원어치 샀다. 제주에서는 봄마다 유채동지 김치를 먹을 수 있다. 봄에만 나는 계절 음식이기 때문에 일반 배추김치 대신 샀다. 오늘 저녁에 먹어봤는데 아삭아삭하고 맛있었다. 김치도 S작가님 추천으로 맛있는 반찬가게에 갔다. 역시 맛집은 인터넷보다 유경험자의 추천이 훨씬 도움 된다. 떡볶이와 호떡으로 배를 채우고 마트에 들렀다. 차가 없으니 근처 마트는 물론이고 편의점도 기본 걸어서 30분 거리기 때문에 작가님들과 함께 나간 김에 장 봐두는 편이 나았다. P작가님께서 흔쾌히 태워주셔서 참 감사하다.
3월 제주 페어가 무산되어 제주로 부쳤던 그림들을 도로 성남으로 부쳤다. 페어 가서 디피할 때 열어볼 생각으로 테이프조차 뜯지 않았다. 덕분에 포장하는 수고를 덜었다. 오히려 좋아. D작가님께서 우체국까지 태워다 주신 덕에 편히 다녀왔다. 차 있으신 분들과 리조트 직원분들께서 차량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와주시니 참 감사하다. D작가님과 시장에서 포장해온 호떡을 객실에서 나눠 먹었다. 작가님 객실로 들어가 그림들을 구경했는데,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색감이 눈에 띄었다. 여러 드로잉을 캔버스지에 하셔서 그런지 연필로 하셨는데도 감각적인 화면이 나타났다. 나도 돌아가면 드로잉을 자주 해야겠다.
즐겁게 얘기를 마친 뒤 객실로 돌아오니 저녁 시간이었다. 졸렸다.. 너무 졸렸다.. 잠깐 눈붙이고 일어나니 철야예배 시간이었다. 보통 그 시간대면 매 주마다 교회에 있는데, 제주에 있으니 신기했다. 나는 평소 사람의 인정에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씀 들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닌거 같기도 하다. 작업도, 앞으로의 인생에서 생길 새로운 목표들을 향해서, 자신과의 싸움을 묵묵히 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왔지만, 조금 더 다듬어져야할 부분인 것 같다.
오늘 객실에 혼자 있을 때마다 계속 '주님을 바라봅니다.'를 들었다. 가사 하나하나가 모두 주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어서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다. 오전에 시장 나가기 전에는 잠시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준비도 했다. 눈물 수도꼭지는 언제 열릴 지 알 수 없는데, 한 번 열리면 콸콸콸 나와서 더 당황스럽다.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약간 웃기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면 울다가 웃으니까 제정신 아닌걸로 보일거 같아 혼자 있을 때만 이러고 싶다. 물론 평소에도 제정신 아닌 편이긴 하지만 이런걸로 들키고 싶진 않다..
철야예배 후에 어머니와 잠시 통화했다. 철야 드리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거신 모양이다. 오늘 실업 급여 신청에 애를 먹으셔서 고용보험센터까지 다녀오셨다고 했다. 내가 성남에 있었으면 직접 도와드릴 수 있었을텐데 제주라 한계가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깨달은게 하나 있다. 작년 연말에 박사 입학 시험도 안되고, 올해 초에 있던 예고 강사 임용도 안돼서 슬퍼했었다.
그런데 그 둘 중 하나라도 됐다면 나는 지금 제주에 올 수 없었을거다. 제주 레지던시는 비성수기인 상반기까지만 작가를 받는다. 박사 과정에 합격했다면 상반기 내내 대학원에서 공부 하느라 레지던시에 참가할 수 없었을거다. 만일 참여가 가능했다 해도 이렇게 다양하고 좋은 작가님들을 못뵈었을거다.
강사 임용도 마찬가지다. 만일 강사 임용이 되었다면 3월부터 일을 하느라 제주에 아예 오지 못했을거다. 엄마랑 이런 얘길 하며 주님께서 얼마나 완벽한 계획 속에서 나를 인도하시는지 다시 깨달았다.
참 감사하고, 주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는구나.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한 정말 원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들로 주시는구나. 사순절 기간동안 이런 은혜를 깨닫게 하시니 더욱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