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된 인생 살기 메뉴얼

24.03.17.SUN

by 이헤윰

눈 깜짝할 새에 돌아갈 날이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나무들이 거의 누워있다.


아침은 S 작가님이 선물해주신 카레와 어제 남은 톳김밥이었다. 조식 시간보다 늦게 일어났지만, 요근래 리조트 직원분들과 작가님들께서 나눠주신 음식들로 냉장고가 점점 가득 차고 있다. 이런 따듯한 분위기가 참 좋고 감사하다. 치킨마크니 크림 커리였는데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카레는 식당에서 팔거나 오뚜기 제품만 먹어봤는데, 요즘은 참 다양한 음식이 많다.


머리가 조금 자랐다. 사용하던 집게핀은 우리 여사님께서 빌려주신건데, 이제 그 집게핀이 나의 머리숱을 다 담지 못해 자꾸 흘러내렸다. 자그마한 핀을 더이상 혹사시킬 수는 없어 다이소에 갔다. 손이 시려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는데 S 작가님과 마주쳤다. 오늘부터 작가님의 부모님께서 며칠 머물다 가시는데, 함께 교래로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날 보신 것이었다. 날이 좋았다면 산책이겠거니 싶었겠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편이라 같이 타고 가자고 하셨다. 걸어서 30분 거리인 다이소를 5분만에 따듯하고 편하게 갈 수 있어 감사했다. 감사 인사와 즐거운 시간 보내시라고 배웅하고 나서는 여러 종류의 집게핀을 둘러봤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 크기도 쓰던 것보다 크고, 색도 부드러운 카키색이었다. 사자마자 착용해보니 머리도 흘러내리지 않아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 선물가게에 들렀다. 우리 여사님께서 친구분들께 팔찌를 선물 드렸더니, 왜 어머니 것은 사오지 않았느냐 말씀하셨더랬다. 팔찌를 사가겠다 얘기하니 동백꽃 모양이 좋다 하셨다. 사장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고 이것저것 추천해주셨다. 어제 한바탕 재고를 쓸어간 바람에 오늘은 많이 사지도 못했는데, 아주 귀여운 주황색 펜을 선물해주셨다. 파는 상품도 아니어서 더욱 희귀했다.

앞으로 다이어리는 당분간 이 펜으로 적어야겠다.


설교 말씀을 들으며 나의 상태를 점검했다. 늘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으려 조심하지만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힘들게 하진 않았을까. 매일 새롭게 역사하시는 주님을 따르지 않고 나의 경험이나 오래된 구습을 따라 고이지는 않았을까. 주님의 때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주님께 말로는 순종하겠다고 하면서 조바심을 내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았을까. 집 앞 교회로 엄마 손을 잡고 따라왔던 6살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적어도 어릴 때의 나는 세상을 잘 모르고 순수했던 것 같다. 바보같을 정도로 요령을 몰라 무시 당할 때도 많았다. 무시 당하기 싫어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부모님과의 조건을 지키려고 열심히 공부했던거 같다. 나는 참 속이 좁고 옹졸한 사람이라 어릴 때 받은 상처를 잘 잊지 못한다.


초등학생 때에는

"너랑 놀면 재미 없으니까 이제 다른 친구랑 놀거야." 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꽤 듣고 산다.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워 혼자 그린 뒤, 어떤지 누군가에게 보여줬을 때에는

"너 그림 못그려. 근데 그게 뭐? 어차피 넌 미대 안갈거잖아." 라는 말을 들었다.

미대에 갔다.


해리포터가 재미 있어 도서관에서 원서를 빌려 읽었을 때에는

"영어 소설책을 네가 읽을 수 있어? 공부도 못하면서? 누가 보면 서울대 가는 줄 알겠다." 라는 말을 들었다.

서울대에 갔다. 대학원에서 툭하면 영어 논문을 읽었다.


인문계고를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미대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고2 때까지는 학원을 가지 않고 공부만 했다. 선행을 하는 학교라 고3 수학 과정을 고2 때 모두 마치는 커리큘럼이었다. 나는 국어와 영어를 상반에서 듣기 위해 수학도 공부했다. 그리고 고3 때 수학 숙제를 풀고 있는데

"미대 가는데 수학을 왜 해? 너 그러다 입시 망해." 라는 말을 들었다.

그 친구는 재수했다. 1년 후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같이 붙었다며 연락하길래 원래 원하던 대학으로 가는게 어떻겠냐고 답했다. 대학에서까지 그 친구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고3 1년 동안 분당에 있는 입시 미술 학원에 가기에 학원비가 너무 비싸

아는 분을 통해 학원비를 절반만 내도 가르쳐 주겠다는 서울의 미술학원에 다녔다. 성적이 좋아 장학생으로 받아줄테니 S대와 K대, 그리고 H대를 합격하는 조건을 내셨다. 원장님도, 선생님들도 최선을 다해 날 가르쳐주셨고, 여러 조언과 진심 어린 챙김을 주신 곳이어서 늘 감사하고 있다. 그 덕에 3곳 중 2군데는 붙었으니 나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전철로 왕복 3시간 거리였다. 저녁 먹을 시간이 없어 지하철역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때웠다. 수능이 끝난 뒤 정시 특강을 가려면 아침 9시까지 서울에 있는 학원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반드시 학교에 들러 출석을 하고 가라고 하셨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매일 새벽 6시 반에 집에서 나와 출석 체크를 하고 서울로 갔다. 그래도 교통편 시간이 맞지 않으면 9시보다 늦게 도착해 학원에서 혼나기도 했다.

"담임도 진짜 융통성 없다. 대학 가는데 보탬도 안되면서 왜 출석을 하고 가라 그래?" 라는 말을 들었다.

분당으로 미술학원을 다니던 친구들은 모두 출석을 하지 않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출석을 한 지 일주일 정도 됐을 때 담임 선생님이 미안하다며 이제 학교에 오지 않고 바로 학원으로 가도 된다 하셨다.


쉬는 법을 모르고 살았다. 지하철 구석에서 문제집을 한참 풀다보면 학원에 도착했다. 입시미술 연차가 짧으니 손이 느리다며 혼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들께서 내 사정을 다 아시고, 정말 합격해서 잘됐으면 좋겠어서 이를 악물고 쓴소리 하신 것 또한 다 안다.


감사하게도 내게 머리가 좋다, 그림을 잘그린다, 천재 같다는 얘길 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난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

머리가 안좋아 까먹고도 계속 봤고, 그림을 잘 그리려고 종이에 쓸린 손에서 피가 나 그림에 묻어 나올 정도로 그렸다. 정시 시험 3일 전에 쓰러져 학원 근처에서 링거를 맞았다. 돌아와서 다시 그림을 그렸다. 10시까지 시험을 보고 엄마 차에 누워서 갔다. 왜 그렇게 절박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때 그림이 아니라 주님을 봤다면 아마 합격 후 방황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때를 추억하며 다시 그 때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난 그 때마다 절대 그 삶을 다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능이 내가 겪은 그나마 가장 출발선이 비슷한 시합이었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과 얘길 할 때마다 무력해지기 싫어 아등바등 뭔가 더 했다. 몸이 그만 좀 하라고 파업 했을 때 삶과 죽음에 관한 고찰을 하기도 했다. 쌓였던 분노를 해소 하지 못한 채 짐을 싸서 가출도 했다. 2주 간 캐리어를 끌고 친구 집을 전전했더니 자취방을 알아봐주셨다. 시험 기간이라 하루는 이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하루는 저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마지막 일주일은 교양 수업 때 만난 언니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조용히 말썽 한 번 없던 딸이 가출한 뒤 정신과 진단을 받아 오니 부모님은 충격을 받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라도 터졌어야 했던거다. 덕분에 가족과의 관계도 가까워졌다.


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루어진거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나 혼자 한 것은 없다. 주변의 호의와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받은게 많은 사람은 더 의식적으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낮아지고 겸손하기로 마음 먹으니 주님께서 보내주신 좋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각자의 이야기와 함께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매 주 반복적으로 만나고, 반복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매일 단조로운 일상을 살다보니 나도 사람인지라 그것들의 소중함을 잊을 때가 많았다. 제주에 와서는 지금 하루하루 뿐 아니라 돌아가서 다시 마주할 일상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제주에 오기 전까지 자기소개를 해야할 때 백수라고만 했다. 화가라고 하기에는 작업을 너무 안해서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얘기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뭐라 하던 주님이 허락해주시고,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길이라는 마음을 말씀으로 받았다.


오늘은 이런 종류의 생각들을 하며 예배를 마치고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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