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Luck. 당신의 여행, 나의 여정

24.03.26.TUE

by 이헤윰

오전에 O작가님께 돌하르방 비누를 드리며 겸사겸사 작업도 구경했다. 유화 작업으로 주변의 사물들을 그리시는 분이셨다. 일상에서 평범해 보이는 소재들을 기록하는 작업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작가가 작품을 그리는 것과 그것을 전시로 선보이는 것은 여러모로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 일기 같은 사적인 내용을 관객에게 보이는 이유가 중요하다. 공적인 메세지를 전달하는 작업은 전시 할 명분이 충분하지만, 사적인 주제가 담긴 작업을 전시하는 것은 더욱 고민이 필요하다. 까마득한 선배 작가님께 고민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었고, 나 또한 대화를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O작가님께서 졸업하신 대학에 부임하신 교수님의 설명을 인용해주셨다. 영화 맥거핀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가 보는 것과 실상이 전혀 다른 맥락을 지니고 있고, 우리의 작업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과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로써 소재와 색감, 작업 방식 등의 수단을 표현하려는 내용에 가장 부합하는 것들로 선택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교수님께서는 영화의 이미지를 차용하실 때도 있고, 여러 일상을 기록할 때에 유화임에도 수채화처럼 맑고 투명한 기법을 사용하신다. O작가님께서는 산책 중 주워온 자연물이나 인공물들을 작가님의 시각으로 화면에 표현하신다. 나는 내가 마주한 공간, 순간, 그리고 여러 소재들을 색감이나 형태, 천연염색과 자수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화면에 구현한다.


대화 중 찾은 전시의 이유에 관한 해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관객들이 전시장 밖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고, 심각한 일상을 마주하며, 작가와 달리 지나치는 풍경에 대한 사색을 할 여유가 대부분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나의 작업이 걸린 전시장에서 쉼표를 찍으며 관객이 경험한 순간에 대해서 회상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순간은 나의 작업들을 통해 상상과 사유를 하고 영혼의 휴식을 취하길 바란다는 마음이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9-30)

이 말씀이 떠올랐다. 주님을 닮아가기 원하는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전시를 통해 이러한 영혼의 휴식을 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 말씀과 마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했다.


자수 작업의 특성 상 앞과 뒤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다른 화면을 보이는데, O작가님께서 뒷면도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리조트에 대여해드릴 작업은 객실에 걸리는 것이라 모두 액자 처리를 할 예정이어서 뒷면이 보일 수 없지만, 다음에 좀 더 크고 다양한 작업들을 모아 전시를 꾸밀 때에는 천을 틀에서 분리해 공중에 늘어뜨리는 디피를 해봐야겠단 얘기도 나왔다. 다른 작가님의 디피를 예시로 들어주셨는데, 철로된 화판을 공중에 매달아 큰 페인팅 작업을 360도로 볼 수 있도록 디피하신 사진이었다. 자수 작업은 앞면만 볼 때와 앞뒷면 모두 볼 때의 느낌이 다른 매력이 있으니, 충분히 시도해보고 싶은 방식이었다.


지금은 작업 초반이기도 하고, 제주 화방에서 구할 수 있는 왁구가 나무로 된 기본 캔버스 왁구 뿐이어서 중앙에 십자 보조대가 있는 정방형을 구매해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보조대가 있는 가운데 부분은 자수를 놓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큰 작업을 할 때에도 보조대가 없는 큰 견틀을 사용하자니 시간이 흐르면 나무가 뒤틀릴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액자 처리를 하거나, 틀에서 분리해서 천만 걸거나, 작은 것들을 여러 개 퍼즐처럼 이어 거는 방식을 생각중이라 말했다. O작가님께서 인사동 쪽 화방 중 한 곳에 대나무로 만들어진 얇고 예쁜 견틀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육지에 돌아가면 들러서 찾아봐야겠다.


나는 아직 신진작가고 나이도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데, 진지한 피드백과 함께 계속 이걸로 해도 되겠다는 칭찬도 해주시고, 여러 조언이나 팁들을 알려주셔서 참 감사했다. 나는 책으로 하는 공부도 좋지만, 이렇게 대화와 교류를 통해 알게 되는 것들이 더 기억에 잘 남아서 좋다. 그리고 더 좋은 작업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적용도 해보는 과정이 재미있다.


오늘은 유익한 대화를 까먹기 전에 기록해둘 필요가 있어 일기를 일찍 적었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은 덕에 점심 때임에도 배가 고프지 않아 마지막 작업을 완성하고 밥을 먹을 것 같다. 이후에는 후련한 마음으로 왁구 뒷면에 작품 캡션과 서명을 적고, 드로잉도 몇 점 좀 더 하고, 작업 내용을 글로 정리해 보내면 정말 끝이다.


오늘 다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방 대청소를 해야겠다.


+

저녁을 사러 편의점에 갔는데 기록할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원래 평소 가던 편의점은 걸어서 35분 정도 걸리는데, 바람이 유난히 차가워 30분 거리의 다른 편의점으로 처음 가봤다. 들어가자마자 외국인 두 분과 직원분이 뭔가 문제가 생긴 듯 보였다. 직원분 연세가 있으신 바람에 영어로 소통이 불가했고, 외국인 여행객 또한 한국어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직원분은 날 보자마자 저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외국인들에게 한국말로 말씀하셨다. 외국인분들도 날 보고 영어 할 줄 아는지 물으셔서 조금 한다고 말했다.


상황을 들어보니 살사소스와 나쵸 세트 박스 안에 있는 나쵸와 소스가 분리된 통 안에 있는지 물으시는 것이었다. 포장지에 모두 한국어로 적혀있어 확인 후 사고 싶은데 개봉이 안되니 물으시는 것 같았다. 둘 다 있고, 다른 통에 개별 포장 되어 있을 것이라 말한 뒤 한 번 확인 해보시라 했다. 어차피 내게 그들이 원하는 포장이란 확답을 들은 상황이어서 구매할 예정이라 미리 뜯어 확인해보니 소스통과 나쵸봉지가 따로 포장되어 있었다. 외국인분들은 기뻐하며 한 개 더 사겠다 하셨고 고맙다고 하셨다. 나도 그들의 여행이 즐겁길 바라며 굿럭~ 한 뒤 밥 먹을 것들을 샀다.


해외 여행 갔을 때 내가 길을 잘 못찾거나 다른 어려움에 처하면 주변 시민분들이 영어로 친절하게 도와주셨던 때가 생각났다. 그들의 도움을 이렇게나마 돌려줄 수 있던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나의 처참한 영어 민낯이 드러나서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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