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기, 작은 위로

24.03.27.WED

by 이헤윰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가만히 있다가 모두 잊어버릴만큼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까먹기도 잘 까먹어서 일기로 적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의 하루 계획은 대청소와 짐정리였다.

내일로 미뤘다. 청소는 내일도 할 수 있지만 오늘 경험한 일들은 오늘이 아니면 겪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님들과 조식을 함께 먹으며 얘기했는데, 내가 육지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오늘 날도 좋으니 같이 나가자고 해주셨다. P작가님의 추천으로 교래 돌문화공원 안쪽에 위치한 카페에서 열리는 <Spring, 봄> 전시를 보았다.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업들을 전시한 소장품전이었다. 제주도 출신, 혹은 제주도에 거주하시는 작가님이거나 아니면 제주도를 소재로 작업하신 동시대 작가님들의 작업이 걸려있을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박래현 작가님, 이응노 작가님, 요시모토 나라 등 근현대 한국 거장과 일본 대표 작가의 원화가 걸려있어 적잖이 놀랐다. 대학원 시험 공부나 수업 때 사진으로 보았던 작업이 실제로 걸려 있어 너무나 신기했다. 카페 대표님께서는 우리의 대화를 들으시고 의문점에 대해 웃으며 친절히 답해 주셨다. 그림 좋아하시냐고 물으셔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어쩐지 그림 하시는 분들 같았다.'는 답을 들었다. 카페에 비치된 도록들도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 중에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회화 도록을 봤다. 2미터가 넘는 커다란 작업을 도록과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기회가 닿는다면 꼭 실제로 보고 싶다.


주문했던 커피가 나와 자리에 두고 용기를 내어 다시 대표님께 찾아갔다. 어제 막 완성한 자수 작업 사진을 오전에 미리 찍어두길 잘했다. 제주의 풍경을 소재로 하는 시리즈와 작업의 포괄적인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 드리면서 작업 사진들을 보여드렸다. 재미있는 작업을 하는 중인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명함을 말씀하시길래 아직 신진작가라 명함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포트폴리오와 CV를 메일로 보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했다. 흔쾌히 수락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내게 주신 명함을 잘 챙겼다. 한 눈에 보아도 노트북으로 바쁜 업무 중이신 것이 보여 굉장히 조심스럽게 갔는데, 하시던 업무를 멈추시고 나의 작업 사진과 얘기를 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T작가님께서는 아쉽게도 우리가 출발한 지 어느 정도 지난 뒤에야 연락이 닿아 카페에 함께 가지 못했다. 하지만 저녁은 숙소 근처에서 먹기로 했기에 T작가님까지 픽업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세꼬시회가 맛있다고 추천 받은 곳이었다. 세꼬시와 돌돔 매운탕을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이런저런 작업 얘기도 하고, T작가님의 고민을 들었다. 제주도에 오기 전 길이 보이지 않아 잠만 자던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진심으로 응원했다. 저녁 식사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T작가님께서 "이제 작가님도 내 멘토에요." 라고 해주셨다. 나는 작가님보다 아주 많이 어리고 아직 모르는 것도 많은데 갑자기 그런 과분한 말씀을 들으니 당황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작가님은 내가 금수저인줄 아셨다고 했다. 금수저니까 작업도 좋고, 박사 한다고 하고, 학벌도 좋고, 여유도 있어 보이고, 이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돈도 잘 쓰는 것처럼 보신 모양이다. 작가님께 응원 드리다가 간단히 집안 환경을 말할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놀라셨나보다.


"저 서민이에요~ 학비 다 제 이름으로 대출 받았어요~" 라고 웃으며 말했다.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T작가님께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거란 말씀을 드렸다. 재미있는 작업이 나올 것 같단 얘기도 했다. T작가님 작업 내용을 들어보니 그랬다. 진심이었다.


나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지만 순전히 주님 은혜로 이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제주에서 보내는 시간동안 내게 그림 하며 살아도 된다는 확신을 주셨다. 그렇게 살아도 주님이 모두 키워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주님 안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 나를 제주에 보내신 것은 한 달간 친히 이 메세지를 전해주시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고난 주간에 내게 새로운 삶과 시작을 이루어주신다. 어서 집에 가서 더 많이, 더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다.


객실로 돌아온 뒤 이전 포트폴리오에 자수 작업을 더해 정리 했다. 파일이 첨부된 메일은 방금 전에 드렸지만, 시간이 늦어 확인 문자는 내일 아침에 보낼 예정이다. 내일은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되어 있어 객실에서 정리를 마치고 T작가님께 돌하르방 비누를 드릴 예정이다. 금요일에는 날이 맑아 H작가님과 빛의 벙커에 가기로 했다. 최근까지 전시 준비 및 점검으로 닫혔는데 다행히 육지로 가기 전에 전시가 열렸다. 작업을 여유 두고 끝내니 못가봤던 장소와 맛집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갈 기회가 생겨 감사했다.


이제 좀 방향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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