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얼한 기억

24.03.28.THU

by 이헤윰

아침에 내리기 시작하던 비는 저녁에 그치고 찬바람만이 남았다.

이제 제주 바람을 맞을 날도, 날마다 바뀌는 색감의 푸른 바다를 볼 날도, 이곳에서 그림 하는 사람으로 지낼 날도 이틀 남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에 마음을 두기도 하지만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쏟아부었고, 육지에 가서도 쏟아부을 것이다.


3시간 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생각을 멈추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도 딱히 피곤하지 않아 낮잠은 안잤다. 대신 오늘 많이 자면 된다.


조식을 먹은 뒤 돌하르방 비누를 들고 T작가님 객실에 방문했다. 어제 들었던 작가님의 고민이 남일같지 않았다. 그냥 사온 비누들 중에서 작가님 각자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색을 선물해드렸는데, 마침 T작가님 드릴 비누가 마지막으로 남았고, 오렌지색 감귤 비누였다. 다른 색과 달리 오렌지색 비누는 잘 팔리는 편인지라 가게 사장님께서 보이지 않는 안쪽 서랍에 아껴두신 비누였다. 나는 감사하게도 리조트 대표님을 통해 사장님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여러 차례 방문한 나름 단골손님(?)이 되어 흔쾌히 하나 꺼내 주셨다.


이 비누를 T작가님께 드리며 답지 않게 말을 좀 많이 했다. T작가님의 작업을 최대한 집중해서 보고, 그림에서 꺼낼 수 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끄집어내고, 작가님과 인터뷰 하듯 많은 질문을 하고, 미술사적 가치로써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이 작업들로 논문을 쓰면 아마 내용이 방대하게 나올 것 같다. 소품 2점의 소재와 구성으로도 꺼낼 수 있는 내용이 이렇게나 많은데, 작가님은 그동안 주위의 부정적인 말들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으신 상황이었다. 이미 닳고 닳아버린 마음으로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진 작가님을 납득시켜드리기 위해 오랜만에 머릿속 전체를 헤집어가며 근거를 차근차근 댔다. 다행히 금방 기운과 의욕을 차리실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궁금해 하고 물어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셨다고 했다.


내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생각들을 잘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방심하다가 생각을 많이 놓치기 때문에 괜찮은 아이디어나 생각은 바로바로 기록해둔다고 했다. 당시에는 날것의 텍스트여도 나중에 곱씹으며 다듬는다고 덧붙였다. 작가님도 작가님의 작업 핵심을 생각나는대로 적어두셨다가 나중에 보시며 정돈하시면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확신이 생길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아마 다른 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말도 많이 못했을거다. 이곳에 와계시는 작가님들 중 나를 제외한 모든 분들이 이미 화단에서 한창 잘나가시는 분들 아니면 굵직한 커리어를 통해 자리도 잡고 대학에 강의도 나가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들 사이에서 주제넘게 내가 뭔가 얘기한다는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T작가님도 마찬가지다. 내가 대학 입시에 매진하고 있을 시절에 이미 작가님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갤러리 레지던시 작가로 선발되시고 작업도 초반에 많이 팔렸다. 해당 대형 갤러리 주최를 통해 해외에서도 레지던시를 하고 오신 분이다. 지금까지 어려운 시기가 길었지만, 새로운 공간도 많이 생겼고, 많이 달라졌으니 다시 시작해보자고 얘기했다. 작가님의 차후 작업들이 기대된다.


객실로 돌아오니 점심 때가 다 되었다. 간단하게 해먹고 작업 노트를 정리했다. 저녁에 다시 돌아와서 확인하니 오타가 있었다. 무려 작업 제목이었다. 역시 글은 한 번 쓴 다음 시간이 지나서 다시 봐야 한다. 여러 번 그렇게 반복해도 오타와 비문을 발견하지 못하는건.. 내가 허당이어서 그렇다.


어제 뵌 갤러리 대표님께도 메일 확인 문자를 드렸고, 몇 년 만에 학부 지도교수님께도 연락을 드렸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그런지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신 것 같다. 대학원에 들어가고 나서 세미나가 있거나 교수님 소유 갤러리에서 뭔가 있을 때, 다른 친구들만 찾아뵙고 나는 연락도 안되고 몇 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문자를 드리니 놀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월은 대학원 시험이 있어 5월에 스승의 날 즈음 찾아뵙겠다 말씀 드렸다.


벼르던 대청소를 드디어 끝냈다. 짐이 생각보다 많아져서 장볼 때 싸왔던 박스에 소포도 쌌다. 방도 모두 쓸고 닦았다. 먼지와 작업 후 남은 실타래가 뒹굴었었는데, 깨끗해지니 이제 좀 후련하다. 그런데 짐을 다 싸고 나서야 냉장고에 넣어둔 청을 넣지 않은게 보였다.. 다시 캐리어를 열어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비가 와서 그런지, 아니면 발목을 접질렀는데 파스만 붙여서 그런건지 늘 말썽이던 왼쪽 발목이 얼얼하다. 그래도 이럴 때마다 유럽에 혼자 배낭 여행 다녀온 생각이 나서 나쁘진 않다.


모레 아침이면 공항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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