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만난 한국 여행자들
#1 든든한 보디가드를 만나다
여행을 계획하며 한인민박이나 투어는 최대한 피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미술과 세계사에 무지한 관계로 바티칸 투어만은 해보기로 했다. 워낙 평이 좋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 투어는 나홀로 여행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투어 편의상 대여섯명씩 팀을 짜주었는데, 동호와 민재를 같은 팀으로 만나게 되었다.
둘은 사촌지간으로 동호는 복학생, 민재는 이제 막 대학1학년을 마친 새내기였다.
동호는 타의로(?) 팀장을 맡았는데 허당스런 어설픔과 무뚝뚝함이 매력있는 아이였다.
민재는 그런 동호를 밝고 유쾌하게 보조하며 어린 나이라 그런지 소년같은 면을 간직하고 있었다.
셋 다 비슷한 또래에 부산 출신이라 더 쉽게 친해졌다.
좋은 인상을 받아 투어를 마치고 다음 날 동행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우리는 다음날 판테온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로밍을 하지 않았던 나는 길을 잃고 헤매다 늦게 도착했는데, 아이들이 기다리다 그냥 가버릴까봐 얼마나 조급했던지... 겨우 도착하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판테온 앞 분수 모서리에 각자 서서 나를 찾고 있었다.
사실 동행 제안을 했던 건 내가 특별한 계획이 없었고 계획짜기 귀찮기도 해서 였는데, 아이들도 런던에서부터 보름 간 여행을 하고 다음 날 로마에서 출국인터라 마지막 날이어서 특별한 일정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고민을 하다가 일단 판테온을 관람하고, 내가 방금 헤매다가 닿은 나보나 광장에 잠시 들렀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시 포폴로 광장으로 가기로 했다.
포폴로 광장에 갔던 건 근처에 있는 보르게세 공원에 가고싶어서였다.
사람많고 북적이는 유명 관광지를 별로 즐기지 않는 터라 찾은 곳이었는데, 나무도 많고 한적해서 여자 혼자 가기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셋은 보르게세 공원의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나도 모르게 '하늘이 예쁘다'는 말을 몇 번이나 주절거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포폴로 광장을 내려다보며 또 한 번 그 말을 내뱉자 민재가 말했다.
"하늘을 하루에 열 번 바라보면 그 사람은 행복한 거라던데."
그랬다.
그때의 나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했던 것 같다.
자유로웠고, 걱정거리는 내일 문제였으며, 옆에는 든든한 동생들이 있었다.
나는 동생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 여행을 스무살 때 했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고.
나는 지금껏 내가 언제 행복한지, 뭘 할 때 기쁨을 느끼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름 주체적인 판단을 거치고 주변의 말만 따라가지 않은 삶이라 여겼지만, 사실은 그 판단조차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기준 안에서 내렸던 것이었다.
그곳을 떠나고서야 나는 진짜 내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