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를 뿐 틀린게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 대한 환상 하나 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파리의 에펠탑이나 런던의 빅벤을 담은 사진으로 형상화된다.
나에게 그 환상은 리알토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베니스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찍은 사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노트북 바탕화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풍경이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피렌체를 떠나 베니스의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했을 때, 뭔가 들뜬듯한 도시의 분위기가 감지됐다.
관광지로 워낙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유난히 북적이는 사람들과 이 분위기는 좀 수상했다.
알고보니 내가 갔던 기간은 운좋게도 카니발 기간이었던 것이었다! (올레~)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피렌체에서의 서러움과 외로움은 베네치아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금세 잊혀졌다.
곳곳의 상점은 다양하고 화려한 가면을 내걸어 외부를 장식하고 있었고, 베니스의 밤은 축제 덕분에 설치된 야간 조명들로 한층 아름다웠다.
유럽의 축제와 우리나라의 축제가 가장 다르게 느껴졌던 부분은 바로 '시민들의 참여'다.
베네치아 카니발의 백미인 운하 퍼레이드는 시민들이 직접 만든 캐릭터 의상을 입고 참여한다. 시민들이 카니발을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부산의 가장 큰 축제라고 할 수 있는 부산불꽃축제의 경우에 시민들은 철저한 객체다. 주최도, 행사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모두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 하청받은 회사의 직원들이다.
축제의 주체로 참여하는 것과 객체로 참여하는 것을 비교해보았을 때, 자신이 삶을 꾸려가는 지역 축제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의 크기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만난 기억에 남는 사람은 호스텔 룸메이트였던 중국계 프랑스인 휘영(huiying)과 일본인 쇼코다.
휘영은 프랑스 남부에 살고 있는데, 베네치아 카니발을 보러 여행왔다고 했다. 화교는 세계 어딜가도 있는 것 같다. 새삼 중국의 힘이 놀랍게 다가온다.
그녀는 어느날 산마르코 광장에 혼자 갔다가 지나가는 서양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휘영은(실제로 서양인은 사진을 못찍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사람은 짜증섞인 말투로 '당신이 이미 이곳에 있는데 잘나온 사진이 왜 필요하냐'고 말했다고 한다. 휘영은 몹시 기분나빠하며 그 사람은 자신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거라고 했다. 그 사람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휘영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휘영이 서양인이었더라도 그 사람은 다시 사진 찍어줄때 짜증을 냈을까? 동양인의 사진찍기식 관광에 대한 편견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을까?
쇼코는 낯도 안가리고 농담도 잘하고 분위기가 어색하면 먼저 나서서 대화를 이끌어 나가곤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이를 물어보더니 내가 나이가 많은 걸 알곤 대뜸 한국말로 "언니~"라고 부르는데 억양과 발음이 한국사람의 그것과 같아서 깜짝 놀랐다.
내가 부산에서 왔다고하자 "언니야~"라고 바로 사투리를 쓰던 쇼코가 어찌나 귀엽던지. 조용하고 예의차리는 줄만 알았던 일본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알고보니 쇼코의 여동생과 엄마가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 지드래곤의 광팬이라고 한다. 자신의 여동생은 한국말을 엄청 잘한다고. 쇼코는 동생 영향으로 한국어를 서당개 풍월 읊듯이 배운듯 했다. k-pop의 힘이 느껴졌다.
쇼코는 프랑스어를 전공해서 몇 년 전에 일년 간 프랑스 리옹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다고 했다. 다음 목적지도 교환학생 시절에 만났던 프랑스와 스위스에 있는 친구집이였다. 쇼코의 일본인 답지않은 성격에는 외국에서의 생활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해 아르헨티나, 러시아, 말레이시아, 두바이 등 여러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휘영과 쇼코를 통해 상대적으로 동아시아 3국이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나라는 매우 유사한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환경을 공유한다. 서로의 나라의 지리와 문화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그 나라의 기본적인 인사말정도는 할 수 있으며, 비슷한 외모와 정서를 가졌다. 이 점을 국제관계에 활용한다면 매우 유용할 것이다. 더이상 동아시아는 국제사회의 변방이 아니다. 오히려 주도적인 위치에서 세계를 끌어가는 입장이 되고 있다. 좁은 동아시아 안에서 서로를 물어뜯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동아시아가 힘을 합친다면 그 집단은 분명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인 이유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크지만, 일본인 쇼코는 내 기억 속에서 여행 중 만난 어느 누구 보다도 유쾌하고 친근했던 친구로 남아있다. 우리는 어쩌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우리 기준에서만 혹은 겉으로만 보고 너무 쉽게 재단하고 판단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좋아보인다고 무조건 추종할 것도 아니고 어떤 이유에서건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것도 아니며, 다른 나라와 다른 문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당연한 것을 늦게나마 배웠다. 다르다는 것이 곧 틀렸음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내안에 깊이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