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농부 신선생님
# 뒷마당에서 밀 구워먹기
목없는 신선생님
학교로 가는 좁다란 도로를 달린다. 시내버스 한 대가 지나갈 만큼 딱 알맞게 만든 도로에서는 서로 자리를 지켜 달려야한다. 앞서 가는 차를 따라 같은 길을 이어간다. 하루마다 길을 나서면 종종 익숙한 뒤태를 바라보게 된다. 황금 마티즈가 그중의 하나였다. 어릴 때 ‘황마’라고 불렀던 이 차 안에는 목없는 운전자가 타고 있다. 그렇다고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다. 목없는 운전자는 3학년 담임선생님 ‘신선생님’이다. 신선생님은 학교에서 가장 키가 큰 선생님이셨다. 어린 내가 기억하기로도 족히 180은 넘으셨다. 키가 높은 선생님이 키가 낮은 자동차를 타다 보니 뒤차에서 바라보면 머리가 없어 보인다.
신선생님은 우리학교를 나온 우리의 선배셨다. 동네꼬마일때부터 학교 선생님이 될 때까지 이 동네를 누비고 다니셨다. 아직까지 선생님의 부모님은 학교 동네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덕분에 우리는 방학이 되면 종종 경운기를 몰고 다니는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땀 흘리는 농부셨고 웃음이 많은 동네 아저씨였다. 선생님은 계절마다 시골의 소소한 행복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다. 선생님만큼 시골의 재미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계실까.
밀굽? 밀굽!
학생이 80명도 되지 않는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모여 하는 작은 행사가 많았다. 그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밀 구워먹기’(우리는 이걸 ‘밀굽’이라 불렀다). 학교 앞마당에 운동장이 있었으면, 뒷마당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다. 언제 심었는지 모를 거대해진 나무들과 돌로 만들어놓은 소소한 놀이터. ‘밀굽’은 이 놀이터에서 1년에 한번밖에 할 수 없는 즐거운 놀이다. 밀굽을 하는 날이면 오전에 모두 뒷마당으로 모인다. 선생님들은 뒷마당 한편에 작은 모닥불들을 만든다. 퐁당퐁당 놓여있는 모닥불에는 친구들이 모여 불을 한창 구경하며 신선생님을 기다린다. 신선생님은 어디선가 한 아름 밀을 들고 오신다. 날이 따뜻해져 초록빛의 밀이 노랗게 물들어가기 전, 신선생님은 경운기에 가득 밀을 거두어 오신다. 각 불마다 나누어진 밀들은 풀냄새로 가득하다.
먼저 밀을 욕심 부리지 않고 적당히 쥔다. 그리고 한 가닥씩 타오르는 불에 살며시 올린다.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모닥불에 마시멜로우를 구워먹는 게 남부럽지 않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밀의 끝을 잡아 이리 저리 돌리며 구우면 곧 새까맣게 변한다. 이제 준비는 끝. 뜨겁기 때문에 조심히 밀이 달려있는 곳을 조심히 불어야한다. 불다보면 재가 얼굴에 앉는지도 모른다. 밀알이 옹기종기 모인 곳을 손바닥에 놓고 열심히 비빈다. 까만색 손바닥에 가득 물들만큼 비빈다. 그렇게 손바닥이 마주치면 어느새 새하얀 밀이 나온다. 고소한 향이 나는 밀을 입에 넣으면 왜 빵이 쫀득쫀득한지 알 수 있다. 고소하고 따뜻한 맛에 얼른 다시 밀을 한 움큼 쥔다. 모두들 불 옆에 모여 손을 비비는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면 신에게 기도를 하는지도 모를 만큼 다들 열심이다.
한참을 먹고 뜨거워지면 아이들은 장난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두 명씩 까매진 손바닥을 친구들 얼굴에 맞대기 시작한다. 얼굴에 재가 묻은 지도 모르는 여러 친구들이 돌아다니면 어느새 전교생 모두가 웃기 시작한다. 선생님이건 학생이건 상관없이 다들 장난을 치기 바쁘다. 밀은 까만게 손이 닿으면 하얗게 되지만, 얼굴은 그 반대로 되어간다. 배가 불러오고 배가 찢어질듯이 웃어버리면 어느새 밀은 없어진다. 텅비어버린 밀들이 쌓여가고 불은 점점 사그라진다. 딱 한줌만 더 먹으면 좋겠지만, 원래 아쉬울 때 끝나는 것이 제일 좋다. 남은 모닥불 불을 끄고 재를 모으면 올해의 밀굽은 끝.
다시 이 맛을 보려면 1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