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39일째, 아르수아에서 오 페드로우소까지

by 이흥재

2022년 10월15일 (토)


어제, 한국에서 온 친구 4명이 한 방에서 잤지만 별로 시끄럽진 않았다. 먼저 온 두 사람과는 인사를 했는데, 나중에 온 두 사람과는 얼굴만 스치고 말았다. 하긴 단체로 온 사람들과는 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있기 때문에 대화에 끼일 만한 여지도 별로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저녁 때 함께 어디론가 나갔다가 잠들 무렵에야 돌아왔었다.


그런데, 아침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어제 묵은 알베르게는 아침 7시부터 나갈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일제히 6시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문제는, 나는 한껏 조심하면서 짐을 챙겨 1층 식당으로 내려갔지만, 1층에서 들어보니 그들은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세수하는 소리 등이 매우 크게 들렸다. 남들은 다 자고 있는데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어떡하나? 한국사람의 문제인지, 나이든 사람들 문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들만의 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나처럼 일찍 일어나는 순례자가 많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일어났던 순례자들도 짐을 들고 침실을 나와 다른 공간에서 짐을 싸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 정도도 생각을 못하다니!


어떻든, 오늘도 내가 첫번째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어제, 일기예보를 봤더니 비가 올 수 있다고 해서 배낭커버를 씌우고 판초우의는 꺼내기 쉽도록 배낭커버 안에 넣어뒀다.


조금 가다 보니 여자순례자 둘이 앞서 가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서 길이 헷갈리는지 잠시 주춤거리다가 내게 지도를 보면서 가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날 뒤따라올 심산이었는지 조금 뒤쳐져서 걸어왔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최대한 빨리 걸었다. 해 뜨기 전까지는 별다른 풍경을 볼 것도 아니라서 걷는 데만 집중했다. 더구나 발의 컨디션도 괜찮은 편이었다.


아르수아부터는 프랑스길과 겹치는 구간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어두워서 주위를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전에 들렀던 바르(오늘은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을 열지 않았다), 병으로 치장한 집, 담벼락에 붙여놓은 메모 등을 보면서 옛모습이 생각났다.

병으로 치장한 집.jpg
병으로 치장한 집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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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8시 반쯤 첫번째 바르를 만났다. 프랑스길로 걸어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바르에는 이미 와있는 순례자들이 여럿 있었다. 스페인어를 잘 하면 이것저것 주문하겠지만, 그저 보이는 대로 주문하는 게 다였다. 그래서 진열해놓은 빵 한조각과 맥주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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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를 나와 조금 걷다 버니 순례도중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동판을 붙여둔 곳을 지났다. 전에 봤고 사진으로도 여러 번 봤던 곳이다. 그렇지만 다른 순례자들은 무심하게 지나갔다. 나도 얼른 사진 한장만 찍고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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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길에서는 이 시간이면 늘 혼자 걸었는데, 프랑스길과 만나니 앞서가는 순례자들이 꽤 많았다. 그러다가 내가 그들을 지나쳐가기도 하고 그들이 바르로 들어가면서 내가 자연스럽게 앞서가기도 했다. 한 동안 가다 보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도 여럿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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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이레네(Santa Irene) 마을로 가는 갈림길에 왔다. 왼쪽으로 가면 산타 이레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지난번에는 갈림길 표시를 못보고 왼쪽으로 갔지만, 오늘은 오른쪽 길로 바로 갔다. 물론 이 길이 질러가는 길이란 건 그 길을 지나고 산타 이레네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Santa Irene)를 보면서 그제야 생각난 것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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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이레네 알베르게를 지나 조금 가니 스탬프를 찍어주는 신부가 있었다. 내게도 스탬프를 찍지 않겠냐고 물어봤지만, 배낭 속에 있다는 제스처를 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가랑비까지 내리는데 거기서 배낭을 내려 크레덴시알(Credencial)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는 저녁기도에 참석하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여러 언어(스페인어와 영어를 비롯한 5개 언어)로 표기돼있었는데, 한글도 있었다. 대단하다, 대한민국! 중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도 아닌 한글로, “아르카 마을 교구교회 순례자미사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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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까진 아니지만 가랑비가 제법 내렸다. 그렇다고 판초우의를 입기에도 애매해서 그냥 걷다 보니 바람막이 점퍼가 다 젖어버렸다. 오늘의 목적지인 오 페드로우소(O Pedrouzo)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일단의 무리를 만났다. 앞에서 교사인 듯한 어른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고등학교에서 온 게 분명했다. 이렇게 비 오는 날 오게 돼서 조금 안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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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가 조금 안돼 오 페드로우소 마을에 도착했다. 어제 예약했던 알베르게(Albergue Otero)를 찾아가는데, 지도에는 보이지 않았다. 없어진 건가? 그럼 다른 알베르게로 가야지. 그렇게 하면서 앞으로 가는데 예약한 알베르게 안내표지판이 보였다. 아, 여기였구나! 그런데 오픈시간이 11시라서 아직은 문이 닫혀있었다. 다행히 입구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더니 조금 있다가 주인이 와서 문을 열어줬다. 곧바로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가 접수를 마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숙박비는 12유로. 그런데 그림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침대가 좀 부실했다. 엄청 삐걱거린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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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부터 한 후에 빨래(비 오는 날이라서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렸다. 각 4유로)까지 마치고 잠시 쉬다가 슈퍼마켓에 다녀오기 위해 주인에게 위치를 물었더니 이리저리 가면 된다고 가르쳐줬다. 그렇지만 역시 반쯤만 알아듣고 무작정 찾아 나섰다.


슈퍼마켓을 찾아가다가 식당 앞을 지나는데, menú del día가 12유로라고 했다. 식당으로 들어가서 몇 시부터 먹을 수 있냐고 하니까 오후 1시부터 가능하다고 해서 먼저 슈퍼마켓으로 갔다. 점심은 menú del día를 먹고 저녁거리만 사면 될 터였다. 그것도 즉석식품이 아니면 훈제통닭이다. 그런데 맘에 드는 즉석식품이 없어서 오늘도 저녁은 훈제통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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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로 돌아가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1시가 되어 식당으로 다시 갔다. 다른 식당들과는 달리, menú del día는 바르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먹도록 돼있었다(바르 직원이 그곳으로 가라고 안내해줬다). 메뉴판을 주는데, 역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에피타이저(Primeros Platos)는 첫 단어(sopa는 수프의 스페인어)만 보고 수프(Sopa de Fideo, 국수 수프)를 주문했다. 늘 먹던 거여서 낯설지 않았다. 문제는 메인 메뉴(Segundos Platos)였는데, 이것도 첫 단어인 ‘Filete’만 보고 그걸로 달라고 했는데, 나온 음식은 가시를 발라낸 생선(무슨 생선인지를 모르겠다)이었다. 스테이크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은 했다. 디저트는 커피를 줬다.


저녁 때까지 계속 비가 내려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라 낮에 사다 놓은 훈제통닭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잠들 때까지 유튜브를 시청했다. 침대가 조금 삐걱거리긴 해도 나혼자 쓰는 것이니 나만 조심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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