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16일 (일)
어제 묵은 알베르게의 정원은 34명이었는데, 순례자는 나를 포함해 6명이 전부였다. 그것도 나를 빼면 모두 여자였다. 홀에 자전거 2대가 있는 걸 보면 그중 자전거 순례자도 있는 것 같았다. 페드로우소는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많을 텐데, 알베르게 주인으로서는 좀 씁쓸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순례자 입장에서는 인원이 적을수록 조용해서 좋긴 하다.
그런데 어제 밤은 조용하지 않았다. 순례자 둘이 밤 10시가 지나도록 웃고 떠들어댔다. 잠깐 조용해진 틈을 타서 얼른 불을 끄려고 했는데, 그 시간에 또 뭔가를 먹고 있었다. 그걸 보고 불을 끄는 게 너무 야박한 거 같아서 잠시 기다렸더니 시끄러움은 계속 됐다. 그러다가 그들이 잠깐 침실 바깥으로 나가길래 얼른 불을 꺼버렸더니 어둠 속에서도 대화가 멈추질 않았다. 이제 어떡하지!
요즘은 무슨 일인지 잠이 좀 준 것 같기도 했다. 어떨 때는 자다 깨서 정신이 말똥말똥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날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밖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어제 인터넷을 봤을 때도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긴 했었다. 출발할 즈음에는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지긴 했어도 판초우의를 입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곳은 프랑스길이라서 순례자들이 많기는 했다. 출발할 땐 안 보이던 순례자들이 앞서 가는 경우도 많았다. 1시간쯤 갔더니 벌써 문을 연 바르도 있었다. 지난번 프랑스길을 걸을 때 들렀던 바르다. 그렇지만 오늘은 너무 이른 시간인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쳤다.
한참 동안 걷다가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길로 가게 됐다. 별로 밝지도 않은 후레쉬로 땅만 비추면서 가다 보니 갈림길이 있는 걸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한동안 가다가 길이 막혀있어서 그제서야 지도를 봤더니 길이 없어졌다. 지도를 보면서 다시 카미노 쪽으로 돌아왔는데도 우왕좌왕하다가 다른 순례자들이 지나가길래 그들을 따라 갔다. 이렇게 멀쩡한 길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나쳤던 내가 한심했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서 걸으면서 사직 찍기도 쉽지 않았다. 이렇게 많이 내리는 비는 이번 북쪽길을 걷는 동안 두번째인 것 같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2시간 반 만에 바르로 들어가 맥주와 빵 한조각을 먹었다. 그곳에는 한국사람인 듯한 젊은이 둘이 있었지만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대체로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말을 걸지만, 둘 이상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게 된다. 그들의 대화에 끼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서다. 아르수아의 알베르게에서도 그랬었다.
3시간 반 정도 걸어서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에 도착했는데, 언덕에 있던 교황방문 기념비(Monumento de Juan Pablo II)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렇지만 어둡고 비까지 오고 있으니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길가에는 ‘km 4,940’이란 표지석이 서있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2021년 3월 기사), 기념비를 철거하고 그 자리를 녹색공간으로 제공하는 대신에 4개의 기념판자만 제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기념비를 세운 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가 악화되어 철거하게 됐다는 설명도 있었다.
이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가 코앞인데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머리를 들 수 없어 그저 땅만 보면서 걸었다. 그러면서 앞서 가던 순례자들을 여럿 따라잡았다. 힘이 있는 동안은 열심히 걷는 게 다였다.
11시 조금 전에 순례자증명서(Compostela)를 발급해주는 순례자사무실(Oficina de Acogida al Peregrino)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던 직원이, 핸드폰으로 먼저 접수하라고 했다. 와이파이도 되지 않아 로밍을 켜놓고 직원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나중에 보니 잘못 입력한 거여서 접수대에서 처음부터 다시 했다. 알려주려면 좀 제대로 알려주든가!
그렇게 30분을 기다려서 순례자증명서와 거리증명서(바욘~ 산티아고 872km)를 발급받았다. 순례자증명서 발급은 무료지만, 거리증명서는 3유로(프랑스길을 걸었을 땐 2유로)를 내야 했다. 거기에다 증명서 보관통(2유로)과 기념배지 6개(각 2유로)를 사느라고 17유로를 지불했다.
점심 때가 돼서 식사를 하고 숙소(Hospedería San Martín Pinario)에 들어갈까 하다가 비와 땀에 젖은 옷이 너무 축축하고 추워서 먼저 숙소로 가기로 했다.
이 숙소는 지난 5월 25유로(아침식사 포함)에 예약한 곳이었다(프랑스길을 걸었을 땐 50유로짜리 방에서 묵었었는데, 침대만 2개일 뿐 시설을 똑같았다). 그런데 접수대에 갔더니 체크인이 오후 1시부터라고 쓰여있었지만, 직원에게 지금 체크인 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다. 숙박비 25유로를 지불한 후에 침실 열쇠를 받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있는 침실로 가서 젖은 옷을 모두 벗고 샤워부터 했다. 그런데 시설은 딱 알베르게 수준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호텔인데. 하긴 비싼 방들은 이렇지 않을 거다. 그래도 많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건물 자체가 매우 오래됐기 때문이다. 스페인에는 이렇게 오래된 건물(저택이나 왕궁)들을 개조해 비싼 가격의 호텔(Parador)로 운영하는 곳이 많다. 이곳도 그런 곳인데, 순례자들에게만 싼 가격으로 제공했다.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비는 계속 내리고 바람까지 부니 한걸음 걷기도 쉽지 않아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먹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결국 그중에서 가장 만만한 오믈렛을 주문했다(맥주 한잔 포함 8.8유로).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호텔 식당 앞에 메뉴판이 게시돼있었다. 좀전에 나갈 때는 내일아침 메뉴만 안내돼 있었는데. ‘Menú Sábado(토요일의 메뉴)’, 가격은 14유로. 시간은 오후 1시부터 3시 반까지. 비까지 맞으며 부실한 식사를 하러 다녀오느니 이걸 먹는 게 훨씬 나을 뻔했다. 저녁식사는 놓치지 말아야겠다.
방에서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4시쯤 비가 그친 것 같아서 대성당 광장(Plaza do Obradoiro)으로 나갔더니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광장뿐 아니라 대성당 주위의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골목에는 대부분 기념품가게들이 있었는데, 가게 안은 물론이고 밖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대성당 뒤쪽으로 돌아갔더니 출입문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지난번 프랑스길을 걸었을 때는 언제든 들어갈 수 있었는데, 왜 줄을 서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줄이 별로 줄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장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전에 들어가본 적도 있었고, 다시 들어갈 마음도 없으니 그저 줄 선 사람들을 사진에 담을 뿐이었다.
슈퍼마켓을 다녀올까 했는데 지도를 검색해보니 최소 500m 이상은 가야 해서 포기하고 숙소로 다시 돌아와 침실로 들어가면서 식당 메뉴판을 봤더니 아직은 저녁메뉴를 게시해놓지 않았다.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6시 반쯤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때도 식당 앞에 저녁메뉴판은 없었다. 궁금해서 접수대로 가봤더니 거기엔 저녁메뉴가 붙어있었다. 식사시간은 8시부터 10시까지, 가격은 13유로였다. 점심보다 싸네! 다시 침실로 돌아가 시간을 기다렸다.
저녁 8시가 되어 식당을 갔더니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먼저 와서 서있었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자리를 안내 받았는데, 무슨 일인지 먼저 왔던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저녁은 수프와 고기를 먹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와인과 물을 다 줬다. 다른 식당에서는 물과 와인 중에 선택하라고 했었는데. 늘 그렇지만 고기에 지방이 하나도 없어서 좀 퍽퍽했다. 더구나 같이 먹을 거라곤 감자튀김밖에 없으니.
와인을 2잔만 마시고 디저트로는 아몬드 케익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직원에게 남은 물을 갖고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해서 물을 들고 침실로 돌아갔다. 시간은 벌써 9시다 다됐다. 그래도 내일 조금 늦게 일어나도 되니 잠자리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