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38일째, 소브라도 도스 몽세스에서 아르수아까지

by 이흥재

2022년 10월14일 (금)


어제도 조용한 밤이었다. 순례자들도 많지 않은데다가 10시 이후부터는 잠자는 내내 조용했다. 누군가 기침을 몇 번 했지만 잠이 깰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새벽 4시 반쯤 한번 일어났다가 다시 잤다.


어제 인터넷을 보니 오늘 비가 올지 모른다는 예보가 있어서 짐을 꾸리고 난 후에 배낭커버를 씌웠다. 판초우의도 꺼내 입기 쉽도록 배낭커버 안에 넣었다. 배낭을 꾸리는 동안 여자 순례자도 짐을 챙기고 있었지만 내가 출발할 때까지도 준비가 덜 돼, 오늘도 내가 어김없이 첫번째로 알베르게를 나섰다.


어둠이 가시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았지만 포장도로만 따라 걸으니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젠 오솔길 같은 숲속 길은 없다. 나무들도 대부분 유칼립투스고 길도 꽤 넓었다. 그래도 핸드폰 불빛이 필요하긴 했다. 날이 밝아오는 8시 반 전까지는 주위풍경을 볼 수 없으니 걷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렇게 3시간 걸은 후에 바르(Bar Bobby)를 만났다. 피로가 누적된 건지 오늘의 컨디션만 그런 건지 알 순 없었지만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매일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는데 오늘만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래도 바르에서 쉬며 맥주와 빵을 먹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나는 듯했다. 이 마을(Boimorto)에는 문을 연 바르들이 여럿 있었다. 그렇지만 한군데 들렀으니 다른 바르는 통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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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니 오늘의 목적지인 아르수아(Arzúa)까지 10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그러면서, 산티아고까지 아르수아를 경유하면 48.1km고, 라바코야(Lavacolla)로 가면 40.6km란 이정표도 함께 서있었다. 그렇지만 라바코야로 가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고, 숙소정보도 잘 모르니 당초 계획대로 아르수아로 가기로 했다.


늘 보던 농촌풍경들이 펼쳐지지만 날씨가 흐리고 비가 흩날리니 경치도 우중충해 보인다. 그래도 들판의 소와 말들은 열심히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대부분의 소들이 늘 비를 맞으며 풀을 뜯고 있는데, 건강에는 괜찮은 건가? 밤새도록 밖에만 있으면 소들도 추울 텐데! 하긴 알아서들 잘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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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 조금 전에 오늘 예약한 알베르게(Albergue San Francisco) 근처까지 왔다. 어제, 알베르게가 오후 1시30분에 문을 연다는 답장을 받았기 때문에 우선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몇 군데 바르를 기웃거리다가 한곳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겠다고 했더니 먹을 게 없다고 했다.


그 바르를 나와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바르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음식이 있는지 물어보기 전에 진열된 토르티야가 눈에 띄길래 그걸로 주문했다. 맥주도 한잔 곁들이면서 알베르게 문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알베르게 문 열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짐을 챙겨 알베르게로 갔더니 발 빠른 여자순례자가 먼저 와서 접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숙박비를 카드로 결제했는데,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요즘은 유로화 환율이 많이 올랐는데, 나는 지난 7월 비교적 저렴하게 환전해왔기 때문에 굳이 지금 환율로 결제하지 않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 차례, 숙박비는 14유로였다.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앉아도 머리가 2층 침대에 닿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대부분의 침대는 너무 낮아서 똑바로 앉아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곳에는 한국남자 둘이 더 있었다. 울산과 부산에서 온 친구 사이라고 했다. 순례길을 걷기 위해 4명이 함께 왔는데, 2명은 아직도 걷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들이 오면서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 우선 샤워부스가 2곳인데, 그들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이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제나 내가 제일 먼저 씻을 수 있었는데. 다음은 세탁기 사용. 샤워한 후에 세탁기를 돌리려고 동전을 바꾸러 다녀왔는데(이 세탁기는 2유로 동전 2개를 넣어야만 했다), 그들이 먼저 옷을 세탁기에 넣어놓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이 세탁기가 무료인줄 알았나 보다. 그러면서 내게 그걸 왜 알려주지 않았냐고 했다. 아니, 무료인 세탁기가 어디 있나? 오늘까지 프랑스길을 걸어왔다면서, 그동안은 무료로 이용했었나? 북쪽길에는 그런 알베르게가 없었는데(아니, 탁 한 곳 있었다. 리엔도의 알베르게)!


아무튼, 그들은 빨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알베르게 바로 옆에 빨래방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세탁기를 돌렸다. 조금 미안하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일기를 쓰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는데, 콘센트에 가까운 식탁에는 먼저 온 여자순례자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비켜달라고 할 순 없으니 슈퍼마켓을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알베르게 밖으로 나가니 주인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슈퍼마켓 위치를 물었더니 이리저리 가라고 하는데, 반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가르쳐준 방향대로 가봤더니 문이 닫혀있었다. 2시 이후에 간 거여서 쉬는 시간인지, 아예 문을 닫은 가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이번에는 카미노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참 갔더니 ‘디아(Dia)’가 있었다. 도시마다 다르겠지만 이곳의 ‘디아’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도 훈제통닭을 찾았다. 그 정도면 이곳저곳 식당을 기웃거리면서 먹을 걸 찾는 것보다 낫다. 오늘도 음료수와 복숭아, 그리고 요구르트를 함께 샀다.


사온 물건을 봉지째 냉장고에 넣어두려고 식당으로 갔는데, 좀전의 그 여자순례자가 아직도 앉아있었다. 이번에는 양해를 구하고 식탁 반대쪽에 앉았더니 잠시 동영상을 보던 순례자가 식당을 나갔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만 콘센트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저녁에는 훈제통닭을 먹었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간도 적당했다. 그런데 함께 먹으려던 복숭아는 한입 베어 물자 너무 셔서 먹지 못하고 그냥 쓰레기통에 넣었다. 바스크나 칸타브리아 지방을 지날 때는 복숭아가 맛있었는데, 아스투리아스 지방부터는 품종이 바뀌면서 복숭아가 대부분 신맛이 강했다. 천도복숭아도 아닌데(천도복숭아도 있긴 했다) 왜 이렇게 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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