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13일 (목)
어제는 정말 조용한 밤을 보냈다. 배 나오고 나이 많은 순례자들이 없어서 그랬는지 코 고는 사람도 없었다. 침대가 심하게 삐걱거리는 거였는데도 움직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첫 잠을 깬 게 새벽 5시쯤이었다. 다른 날은 한밤중에 깨는 게 다반사였다.
오늘은 아침식사를 7시 반부터 준다고 해서 6시 반에 알람을 맞춰놨었는데,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 그냥 더 잤다. 그리고 7시쯤 일어나 짐을 챙겨서 식당으로 갔더니 여자 순례자가 벌써 본인이 챙겨온 아침을 먹고 있었다.
7시 반쯤 됐을 때 엊저녁에 먹었던 빵과 커피, 그리고 잼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빵 조각이 워낙 커서 하나만 먹어도 아침으로 충분할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양치한 후에 배낭을 꾸려 오늘도 첫번째로 알베르게를 출발했다. 8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
오늘 걸을 거리는 아주 짧았다(15km쯤). 그래서 아침식사까지 챙겨먹을 시간이 있었다. 어차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해도 알베르게 문 여는 시간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너무 빨리 가는 것도 좋지만은 않다.
늦게 출발했더니 어둠은 이내 가셨는데, 그 자리를 오늘도 안개가 대체했다. 얼마나 안개가 많이 끼었는지 안개비가 내리는 듯했다. 하늘에 구름이 많은 것 같지 않은데도 숲으로 들어갔더니 빗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게 낙엽 떨어지는 소리인지 안개비 내리는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자꾸만 축축해지는 것 같아 배낭커버를 씌우고 걸었다.
매일 걷다 보면 심한 오르막을 제외하고는 대개 1시간에 4~5km 정도의 속도로 걷는다. 그런데 처음에는 괜찮지만 4~5시간 걷고 나면 발에 피로가 많이 쌓여서 하루에 20km 이상 걷는 날은 발이 매우 아프다.
그렇게 걷고 있으면, 오래 전 군대에서 천리행군 하던 생각이 자주 난다. 그때는 군장도 지금보다 훨씬 무겁고(지금은 10kg 내외지만, 그때는 25kg쯤 됐다)거리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멀었다. 천리면 대략 400km쯤 될 텐데, 그걸 1주일 정도에 걸었다. 그러니 하루에 10시간씩 50~60km 걸어야 한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1시간에 7~8km 정도의 속도로 뛰듯이 간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아무리 군인이라도 피곤하기 때문에 속도가 4km 정도로 뚝 떨어진다. 물론,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군인이어서 그랬을 수 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2시간쯤 걸었을 무렵 마주 오는 여자 순례자를 만났다. 그녀가 먼저 조심스럽게 “한국인?” 하고 물었다. “Si!” 그렇게 대답하진 않았다. 아무튼, ‘나도 한국인이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서 길거리에서 수다가 시작됐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카미노 얘기가 이어졌다.
그녀는 성북구에 살며 한때는 애들 교육 때문에 대치동에 살았었다고 했다. 나는 송파구에 살며 한때 대치동에 있는 포스코센터에 다녔었다는 얘기로 대화가 시작됐다.
그녀는 4년전(2018년 6월) 프랑스길을 걸었다고 했다(나도 같은 해 9월 프랑스길을 걸었다). 그때는 20일 만에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까지 갔다고 했다(나는 33~34일 걸렸다). 테니스와 마라톤을 했기 때문일 거라고도 했다. 이어서 무시아(Muxía)와 피스테라(Fisterra)까지 또 걸었단다. 나도 이번에 그 코스를 걸을 예정이다.
이번에는 친구들과 함께 스페인에 와서 여행한 후에 친구들은 한국으로 먼저 돌려보내고 포르투갈길(Camino Portugués)를 걸은 후에 산티아고에서 거꾸로 북쪽길을 걷고 있는데, 완주할 생각은 아니고 빌바오와 산 세바스티안을 둘러보려고 한단다.
시간 되는 대로 걷다가 20일쯤 버스를 타고 빌바오로 가서 3일 정도 시간을 보내고, 다시 산 세바스티안으로 이동해 구경한 후에 바르셀로나로 버스를 타고 가서 귀국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배고플 때를 대비해서 견과류를 갖고 다닌다면서 나한테도 꼭 구해서 갖고 다니는 게 좋겠다고 당부했다. 견과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그래도 건강을 위해 먹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아무튼, 그녀는 카미노를 걷는 게 큰 낙인 것 같았다.
지난번 만났던 조도 6년전(2016년)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들과 함께 프랑스길을 걷고, 이번에 북쪽길을 다 걸은 후에(아들은 지금 군복무 중이라고 했다) 지금은 세비야에서 출발하는 은의길(Via de la Plata)을 걷겠다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시 포르투갈의 포르투(Porto)로 가서 포르투갈길 일부를 걷겠다고까지 했다.
그 정도면 다들 카미노 중독이다. 나도 그렇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번 걷고 나면 또 걷는 순례자들이 아주 많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서로 다르겠지만 자꾸만 생각나는 건 뭔가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이번에 돌아가면 2년 후(2024년) 다시 와서 포르투갈길을 걸을 예정이다. 좀전에 만났던 그녀도 포르투갈길이 아주 좋으니 꼭 가보라고 추천했었다.
나중에 만난 미국인 순례자가 나한테 오더니, ‘너도 그 한국여자를 봤냐’갈래 ‘그렇다’고 했더니 “Crazy!”라고 했다. 그녀는 앞으로 걸으면서 계속 순례자들을 만날 테고, 비슷한 질문을 받을 텐데 일일이 답변하려면 꽤 성가실 것 같았다.
안개는 10시가 지나면서 다 걷혔다. 그리고 날씨도 맑아졌다. 햇볕이 심하진 않았지만 걷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숲길과 포장도로를 왔다 갔다 하면서 3시간쯤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소브라도 도스 몽세스 초입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저수지가 있고, 그 앞에 나무를 눕혀놓고 ‘SOBRADO’라고 써 놓았다. 여기 와서 저수지를 본건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그리 크진 않았다.
조금 걸으니 유명한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ía de Sobrado dos Monxes) 첨탑이 보였다. 그곳에도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l Monasterio de Sobrado dos Monxes)가 있지만 오늘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묵을 예정이다. 지도를 보면서 알베르게를 찾아가다가 점심 때가 돼서 식당으로 먼저 갔다. 입구에 ‘menú del día’라고 쓰여 있어서 그걸 주문하려고 했더니, 오후 1시부터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단일메뉴를 주문하란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림을 보고 치킨을 주문했는데, 나온 걸 보니 튀김이었다. 닭고기 맛이 나지 않을 정도로 튀김옷이 두꺼웠다. 핫소스라고 주는데, 색깔만 빨갛고 아무런 맛이 없었다. 파프리카 소스인가? 값(10유로)에 비해 맛은 별로였다. ‘menú del día’가 11유로인데, 너무 아까울 정도였다. 이럴 거면 1시간 후에 ‘menú del día’를 먹는 건데(저녁에라도 먹으려고 했더니 오후 5시까지만 판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알베르게(Albergue Lecer)로 갔다. 오늘도 역시 첫번째 도착이었다. 숙박비는 12유로였다. 알베르게에는 따로 세탁할 곳이 없으니 세탁은 시내에 있는 빨래방으로 가서 해야 한다고 했다.
얼른 씻은 후에 어제 손빨래 한 옷까지 챙겨서 빨래방을 찾아갔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2대씩 설치돼있었다. 세탁기는 빨래 무게에 따라 가격이 다르고, 건조기는 온도에 따라 달랐다. 그렇게 7유로를 내고 세탁과 건조를 마쳤다.
빨래를 들고 슈퍼마켓으로 갔다. 슈퍼마켓은 도로 양 옆으로 2개가 있었는데, 다른 도시들에 비해 규모는 아주 작았지만 저녁거리로 필요한 물건들은 다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저녁식사를 식당에서 할지 알베르게에서 먹을 건지 결정하지 않아서 음료수만 사서 나왔다. 저녁 때 식사할 곳을 찾아보고 마땅치 않으면 그때 사도 될 것 같아서였다.
저녁 무렵 식당을 돌아다녀보니, 이곳의 ‘menú del día’는 오후(1~2시부터 4~5시까지)에만 파는 음식인 것 같았다. 지난번 프랑스길을 걸을 때는 주로 저녁 때 먹었었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저녁식사 할 마땅한 식당을 찾지 못해서 슈퍼마켓에서 즉석식품을 사 먹기로 했다.
슈퍼마켓에 가려고 알베르게를 나서니 비가 조금 오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다린다고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고, 더 내릴 수 있다. 그래도 다행히 많이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알베르게에서 슈퍼마켓까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를 맞으면서 가니 꽤 멀게 느껴졌다.
슈퍼마켓(Aliprox)에 가서 낮에 봐뒀던 즉석식품을 사고, 함께 먹을 과일과 음료수, 요구르트까지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대추야자도 하나 샀더니 가격이 10유로가 넘었다. 그러면 외식하는 것과 비슷한데!
침대에서 시단을 보내다가 6시쯤 식당으로 가서 즉석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는데 데워지질 않았다. 왜 그렇지? 다시 돌렸지만 별로 나아지질 않았다. 옆에 다른 전자제품이 있긴 했지만 어떻게 사용하지는 몰라서 덜 데워진 즉석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