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12일 (수)
이곳 유럽 젊은이(중년들이 포함될 때도 많다)들의 공중도덕은 정말로 한심하다. 어제도 밤 10시가 되도록 웃고 떠들다가 10시가 되어 알베르게의 물을 껐지만 아래층에서는 여전히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다시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서너 명이 그제서야 잠자러 2층으로 침실로 올라왔는데, 다시 소곤거리고 화장실 가는데 발자국 소리를 크게 내고(나무마루 바닥이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소리가 매우 크다) 시끄러움이 한동안 계속 됐다. 유럽사람들이 대화를 즐긴다지만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전에 프랑스길을 걸을 때는 저녁 8시면 침대에서 자는 사람들도 있어서 알베르게 주변은 언제나 조용했다. 그때도 10시에 자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잠자는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충분히 떨어진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왔는데, 이곳의 순례자들은 그런 예절이 거의 없었다.
오늘은 당초 미라스까지만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엊그제 지도를 다시 보다가 바아몬데에서 미라스까지는 너무 가까우니 조금 더 가볼까 했는데 중간에 아 브라냐(A Braña)를 아 록시카로 잘못 알고 거기까지 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록시카에는 알베르게(Albergue Casa Roxica)도 있으니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막상 아 록시카로 목적지를 변경하고 나니까 바아몬데에서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
바아몬데에서 내일(10월13일)의 목적지인 소브라도(Sobrado dos Monxes)까지 가는 길을 두 갈래다. 한 루트는 미라스를 경유하고(39.8km), 다른 루트는 아스 크루세스(As Cruces)를 경유한다(32.0km). 두 루트 다 거리가 30km 넘기 때문에 하루에 걷기엔 벅찰 것 같았는데, 미라스를 경유하는 경우에는 미라스에 알베르게가 있어서 거기 묵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아 록시카로 목적지를 변경한 후에, 엊그제 알베르게에 전화해서 숙소예약을 마쳤었다. 그런데 어제 다시 연락하면서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다시 이메일을 보내 예약을 확인했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발준비를 하는데 다른 순례자들 몇몇도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좀 멀리 가는 건가? 아무튼, 내가 먼저 출발준비를 마치고 첫번째로 알베르게를 나섰다. 그리고 그 후로는 그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아마 다른 길로 간 건지도 모르겠다.
1시간쯤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으로 가면 ‘km 95.383’ 오른쪽으로 가면 ‘km 86.497’이었다. 왼쪽 길이 미라스를 경유하는 길이니까, 오른쪽은 아스 크루세스로 가는 길일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지도에는 오른쪽으로 가는 카미노가 표시돼있지 않았다. 하긴 어차피 오늘은 왼쪽으로 가야 하니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아침 8시 반이 지나면서 날이 좀 밝아오나 싶었는데, 이내 안개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러니 앞이 뿌연 길을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는 바다나 강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안개가 끼는 거지? 아무튼, 안개는 2시간 걷는 동안 지속됐다.
이곳을 지나면서 보니 돌로 지은 집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빈집이었다. 그리고 새로 짓는 집들은 돌로 짓지 않았다. 아무래도 돌집이 보기엔 좋아도 살기에는 불편했었나 보다. 또한, 이곳에서도 오레오를 많이 봤는데,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보던 것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았다.
3시간 반쯤 걸어서 당초의 목적지였던 미라스에 도착했다. 처음엔 미라스인지도 몰랐는데 알베르게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바르가 있어서 들어갔더니 그곳이 미라스라고 했다. 들러보니 미라스는 조그만 동네여서 편의시설도 거의 없는 마을 같았다. 만약 이곳에 묵었다면 이 바르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미라스의 바르에서는 마땅히 먹을 만한 게 없어서 맥주 한잔과 조그만 빵 하나를 시켜서 먹었다. 빵 맛은 괜찮았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 그렇다고 더 시켜먹기도 애매해서 조금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배낭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심하진 않지만 오늘도 약간의 오르막이 있었고, 그만큼 힘들게 올라갔다. 그런데 미라스를 지나면서부터 풍경이 바뀌는 것 같다. 주변환경도 조금 낯설고 식생도 달랐다. 지금까지는 유칼립투스를 많이 보면서 왔는데, 이곳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당연하지만 길바닥에도 솔잎이 많이 쌓여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건 소나무가 엄청 크다는 거였다. 정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유칼립투스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우리나라에서 봤던 낙엽송보다도 더 곧고 키가 컸다. 종자가 다른 건가? 토양이 달라서 그런가? 이유는 모르겠다.
미라스를 떠난 지 2시간 반 만에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아 록시카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동네다. 알베르게와 그에 딸린 살림집 그리고 그 옆으로 2~3채 정도의 집이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 표지석이 있는데, ‘km 75.576’이었다. 바아몬데가 100km 지점이니까 25km 정도 걸은 셈이다. 미라스에서도 10km를 더 온 거였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침대가 10개로 아주 작았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집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는 체했다. 이들이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주머니가 오더니 침대로 안내하고 접수를 받았다. 숙박비는 12유로. 저녁식사 10유로와 내일 아침식사 3.5유로를 포함해서 25.5유로를 냈다. 내일아침 식사는 7시 반부터라서 조금 늦긴 해도 내일 걸을 거리가 짧으니 늦게 출발해도 된다.
샤워하고 빨래까지 한 후에 점심을 주문해야겠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계란과 소시지가 들어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요구르트와 함께. 음식 나온 걸 보니 계란 프라이 2개와 소시지 2개였다. 곁들여 주는 빵과 함께 먹으니 맛은 괜찮았는데 소시지는 조금 짰다.
점심을 먹은 후에 일기를 쓰고 있는데 순례자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다. 오늘 혼자서 저녁 먹는 건가 생각했는데, 그러진 않아도 될 것 같다.
미국에서 왔다는 순례자가 맥주를 한 캔 사주겠다고 했다. 땡큐! 주방에 있는 자판기에서 맥주(Estrella Galicia) 한 캔을 뽑아 내게 줬다. 시원하고 좋았다. 여기서는 주로 생맥주를 마시는데 처음 마셔본 캔맥주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름도 생소한 록시카의 알베르게에 사람들이 올까 생각했는데, 나처럼 찾아온 순례자들이 꽤 있었다. 여기 침대가 10개 뿐인데, 아마도 그 이상의 순례자가 온 것 같았다. 침대를 차지하지 못한 순례자들은 다른 공간에서 지낸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겠다.
낮에 접수하면서 저녁은 물론 내일아침까지 함께 주문했는데, 저녁식사는 8시부터 시작됐다. 그 시간까지 유튜브 등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함께 먹은 순례자는 5~6명쯤 됐다. 다른 순례자들은 각자 가져온 음식을 먹었고, 더러는 와인만 따로 마시는 순례자들도 있었다.
저녁메뉴는 식당에서 파는 ‘오늘의 메뉴(menú del día)’와 비슷했다. 다만 선택사항은 없고 주방에서 주는 대로 먹는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먼저 갈리시아 수프(국수처럼 생겼다. 다른 곳에서는 시래깃국 같은 걸 주기도 한다)가 나오는데, 양이 아주 많았다. 큰 그릇에 수프를 주고 접시를 따로 줬는데, 양껏 먹어도 남을 정도였다. 나는 2접시쯤 먹은 것 같다.
메인 요리는 스테이크였는데, 오랜만에 먹어보는 거였다. 그동안 고기음식을 먹긴 했어도 대부분 퍽퍽한 부분이어서 먹기 어려웠는데, 오늘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디저트는 따로 없었지만 레드와인과, 집에서 직접 구운 듯한 빵이 있어서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에 다른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느라고 좀더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나는 양치질도 할 겸 침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