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11일 (화)
어제 잤던 2층 침대는 오르내리는 것만 빼면 아늑하고 좋았다. 특히 침대 쿠션이 두꺼워서 푹신하고 안락했다. 불편한 오르내림은 최소화했지만 그래도 선택하라면 당연히 아래층 침대다.
어제, 내일(10월12일) 묵을 알베르게(Albergue Casa Roxica)를 전화로 예약했는데, 제대로 된 건지 잘 모르겠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12일(doce dias) 예약하겠다고 외쳤는데, 잘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래서 오늘 바아몬데(Baamonde)에 도착해서 전화했더니 연결되지 않아 이메일을 보냈는데, 예약이 잘 이뤄졌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2층 침대에서 내려오려니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짐을 다 들고 식당으로 나와 배낭을 꾸렸다. 언제나 짐을 싸면서도 뭔가 빠트린 게 없나 염려하지만 어차피 지나봐야 뭐가 없어진 걸 아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은 초반부터 숲속 길이 이어졌지만 길이 넓은 데다 높낮이도 심하지 않아서 그런대로 걸을 만했다. 더구나 오늘 걷는 거리가 20km 정도이니 서두를 것도 없었다.
요즘이 음력으로 보름 즈음인 것 같다(나중에 달력을 찾아봤더니 어제가 9월 보름이었다). 7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구름이 걷히면서 밝은 달이 두둥 떠올랐다가 이내 다시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궁금한 건 어떤 구름은 달을 가리고 어떤 구름은 달이 보이는데, 그럼 달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구름인 건가?
2시간 남짓 걸어서 카페(Casa Alejandro)를 만났다. 포장도로로 가다가 막 샛길로 빠지려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마을주민들이 여럿 들어와 있었다. 이들도 모닝커피를 즐기나? 집에서 마셔도 될 텐데. 아니, 무슨 사정이 있겠지. 나도 모닝커피를 한잔 시켰더니 조그만 빵을 하나 줬다. 아침 대용이다.
카미노는 역시 밝아야 주위를 둘러보면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그러려면 늘 출발하고 2시간 이상 지나야만 한다. 오늘은 흐린 날이어서 그런지 8시 반이 지나도 완전히 밝지 않았다. 9시가 거의 되어서야 해가 뜨는 것 같으니 너무 늦은 게 확실하다.
오늘은 대부분 평지를 걸어서 그런지 몸의 컨디션도 좋았다. 가끔 발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다른 날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게다가 아침부터 쉬면서 커피까지 한잔 마셨더니 더 힘이 나는 걸까?
오전 11시 조금 전에 바아몬데 초입에 도착했는데, 표지석을 봤더니 ‘100.937’였다. 그렇다면 얼마 안가 ‘100.000’ 표지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프랑스길에는 ‘100,000’ 표지석이 있다). 그래서 11시 정각에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Baamonde)에 도착했지만(어차피 오후 1시에 문을 연다고 쓰여있긴 했다), ‘100.000’ 표지석을 찾으러 좀더 가보기로 했다. 마을 끝으로 갔더니 ‘100.459’ 표지석이 있었다. 이제 500m만 더 가면 ‘100.000’ 표지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갔는데, 이번에는 ‘100.201’ 표지석이 보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다음 표지석이 보이는 곳으로 조금 더 가봤다.
그런데 다름 표지석에는 ’99.994’라고 쓰여 있었다. 이왕이면 조금 앞에 ‘100.000’ 표지석을 세우면 될 텐데 왜 그랬을까? 그곳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으니, 그저 조금만 옮겨서 세우기만 한 될 일이었다. 프랑스길의 100km 표지석에는 온갖 낙서를 해놓고 기념하는 게 보기에 안 좋았나? 아무튼, 누군가 장난스럽게 100km 자리에 돌을 조금 쌓아놓고 거기에 ‘100km’라고 써 놓았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 옆에 있는 바르로 갔다. 점심을 먹겠다고 했더니 음식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바를 나와 맞은편에 있는 바르로 갔더니 먹을 게 있다고 해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받고, 뭘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커피도 있고 맥주도 있고 술도 있다고 했다. 아니 음식 말이야! 그랬더니 토르티야와 절인 올리브열매, 햄 조각을 조금 줬다. 맥주도 시켜서 조금 부족한 점심을 먹었다.
잠시 앉아 있었더니 순례자들이 바르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어차피 점심을 먹어야 하고 알베르게 문을 열 때까지는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나와 비슷한 사정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12시 반쯤 알베르게로 돌아갔더니 순례자들 몇몇이 알베르게 마당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어디로 들어간 거지? 알베르게 앞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출입문을 열어줬다.
마당에서 다시 30분 가량 기다렸더니 오후 1시가 되어 알베르게 문을 열어줬다. 여럿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들어온 순서대로 나는 다섯번째로 접수를 마쳤다. 이 알베르게는 90명 이상 수용하는 공립 알베르게였다.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한 후에 어제 손빨래 했던 옷들까지 한꺼번에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3유로). 건조기를 돌리려면 2유로가 추가로 필요했지만 바깥 날씨가 좋으니 널어놓으면 마를 것 같아서 그냥 빨래줄에 널었다. 만약 저녁 때까지 마르지 않으면 그때 건조기를 돌려도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이곳은 순례자를 많이 수용하는 대형 알베르게지만 워낙 넓으니 순례자들과 부딪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쉬운 건 이곳 역시 와이파이가 되지 않고, 주방에는 전자레인지 하나밖에 없었다. 접시는 물론 숟가락이나 포크 하나 없었다. 저녁을 어떻게 먹지? 바르에서 저녁거리를 파는 지도 모르겠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와도 숟가락이나 포크까지 구해와야 할 것 같다.
저녁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으로 가다가 점심 먹은 바르를 지나게 됐는데, 낮에 등록해둔 와이파이가 연결돼서 바깥에 있는 의자에 앉았더니 잠시 후에 주인이 와서 뭘 주문하겠냐고 물었다. 그냥 조금 앉아있다가 갈 건데!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커피를 한잔 시켰다. 카페 아메리카노가 1유로였다. 그리고는 오늘과 내일의 알베르게를 이메일로 예약하고 인스타그램을 업로드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5시 반쯤 일어나서 바로 옆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갔다. 이름을 거창하게 슈퍼마켓(supermercado)이라고 써놓긴 했지만, ‘슈퍼’는 아니고 그냥 가게였다. 그래도 내가 필요한 물건은 다 있었다. 알베르게에는 접시나 컵은 물론 숟가락이나 포크도 하나 없어서 전부 준비해야 했는데, 1회용 숟가락과 포크도 있었다. 다만, 묶음으로 사면 조금 싼데, 그걸 다 쓸 일이 없으니까 하나씩만 샀다.
가게에서 한봉지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와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6시 밤쯤 낮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고, 동그랑땡처럼 생긴 즉석식품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사과파이와 요구르트, 복숭아, 음료수 등으로 저녁을 먹었다. 풍족한 저녁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임시변통으로 해결하는데 어느 정도 적응했기 때문에 아쉬울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