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10일 (월)
인터넷을 보니 오늘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새벽에 빗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출발하려니까 비가 쏟아졌다. 침실에서 1층으로 내려가 곧바로 문을 열었을 때는 비가 좀 그치는 듯했지만 배낭을 꾸리는 동안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출발을 늦출 수는 없었다. 예보대로라면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으니까 언제 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배낭커버를 씌우고 판초우의를 뒤집어쓴 후에 비를 맞으면 출발했다.
오늘 같은 날은 비에 젖을 까봐 핸드폰을 들고 걸을 수 없으니까 불빛 없이 걸을 수 있는 국도(N-634)를 따라갔다(좀 어두워도 흰 경계선을 따라가면 된다). 다행스럽게도 국도가 오늘의 목적지인 빌랄바(Villalba, 갈리시아어: Vilalba[공식어])까지 거의 직선으로 나있고, 카미노는 국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카미노를 벗어날 염려도 없었다.
조금 걷다 보니 빌랄바까지 18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4시간 반만 걸으면 되는 거리였다. 높낮이도 별 차이가 없어서 다른 날보다 걷기도 편했다. 월요일이라 이른 시간임에도 차들이 좀 다니긴 했지만 갓길이 꽤 넓어서 교통에 지장을 주지 않고도 걸을 수 있었다.
오늘은 3시간 남짓 걸은 후에 바르를 만났다. 다행히 비도 조금 그친 후였다. 덕분에 판초우의도 말라서 물기가 거의 없었다. 바르에 들어갔을 때 빗물이 뚝뚝 떨어지면 많이 미안했을 텐데. 배낭을 내려놓고 화장실부터 다녀온 후에 커피와 빵을 주문했다. 다른 날 같으면 맥주를 마실 시간이지만 오늘은 비가 와서 기온이 좀 내려간 탓에 그렇게 덥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1시간 반쯤만 더 걸으면 빌랄바에 도착한다. 조금 가다 보니 1km 앞에 알베르게가 있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공립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Vilalba)였다. 그런데 시내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지내기에 불편할 것 같아 그냥 지나쳤다.
10시 반쯤, 차도를 건너는 육교를 발견했는데, 그 옆으로도 길이 있었다. 지도를 봤더니 그 육교로 가지 않고 옆길로 가서 차도를 건너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옆길로 갔는데, 도로를 따라 울타리를 설치해놓아서 길을 건널 수가 없었다. 결국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육교를 건너야 했다. 좀 편하게 가려다가 헛걸음만 한 셈이었다. 그렇게 육교로 한참 돌아서(이곳 육교들은 대부분 계단 없이 경사로를 설치한 곳이 많아서 오르내리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빌랄바로 가는 카미노로 들어섰다.
여기를 지나면서 낯선 풍경을 봤다. 대부분의 돌담은 돌을 쌓아서 설치하는데 반해 이곳은 판석을 세워서 돌담을 만들었다. 이끼가 끼고 풀들이 엉겨있는 걸 보면 꽤 오래 전에 만들어놓은 것일 텐데, 어디서 이런 판석을 옮겨왔는지 궁금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돌을 채취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랄바 시내를 지나는데 태권도장이 눈에 띄었다. 스포츠센터와 겸하고 있는 곳인 것 같았는데, 유리창으로 내부를 들여다봤더니 한국에서 받은 단증과 공로표창장이 걸려있었고 도복차림으로 무릎 꿇고 앉아있는 사범인 듯한 사람의 사진도 보였다.
카미노 표시를 따라 빌랄바 시내를 가로질러 11시 조금 지난 시간에 알베르게(Albergue As Pedreiras)에 도착했다. 출입문에는 낮 12시에 오픈한다고 적혀있었는데, 나랑 비슷한 시간에 온 다른 순례자가 주인에게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해서 나도 덩달아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 부부는 열심히 청소하느라고 접수를 받아주진 않았다. 땀과 비에 젖은 옷 때문에 몸이 조금 으스스했지만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와이파이가 되니 유튜브 등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낮 12시쯤 청소를 끝낸 주인이 접수를 받았다. 내 앞에 온 순례자가 먼저 접수를 마치고 그 다음이 나 차례였다. 그런데 침대가 2층만 남았다고 했다. 아래층 침대는 전부 예약한 순례자들의 차지라고 했다. 나도 가끔 예약을 했었지만, 그때는 계약과는 거의 관계없이 침대배정이 됐는데, 오늘처럼 침대가 많이 않은 알베르게는 예약하지 않으면 침대가 아예 없던가, 2층을 써야 했다(이렇게 해서 두번째로 오르내리기 불편한 침대를 쓰게 됐다).
잠은 자야겠기에 2층 침대를 배정받고(이곳 2층 침대는 오르내리기에 약간 불편해도 안락하고 좋았다), 주인에게 물어서 슈퍼마켓을 찾아 나섰는데, 가르쳐준 대로 아무리 가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좀 전에 왔던 길로 한참 동안 되돌아갔더니 슈퍼마켓(Gadis)이 보였다. 점심과 저녁에 먹을 즉석식품을 사고, 함께 먹을 복숭아와 요구르트, 음료수도 샀다. 그런데 알베르게로 와보니 물을 사오지 않았다. 또 다녀와야 하나?
슈퍼마켓에 가기 전에 돌려놓은 건조기가 아직도 돌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건조기에 있는 빨래를 꺼냈는데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전에는 건조기를 1시간씩 돌렸었는데, 이곳은 40분에 설정돼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할 수 없이 침대 둘레에 빨래를 모두 널었다. 이럴 땐 2층 침대가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다 좋고 다 나쁜 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수건과 양말이 오래 마르기 때문에 내일 아침까지 마를지 모르겠다.
수요일(10월12일)에는 당초 예정했던 미라스(Miraz)를 지나 아 록시카(A Roxica)까지 가야 할 것 같다. 미라스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고(14.9km), 다음날은 더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24.9km). 다만 아 록시카의 알베르게가 10개의 침대(12유로)밖에 없기 때문에 내일은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만약 예약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미라스까지만 가야 할 수도 있다.
저녁에는 주방이 북적북적했다. 여러 팀들이 서로 저녁을 해 먹으려고 하니 좁은 주방의 동선이 꼬였다. 그래도 다들 잘 피하면서 자기들이 필요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요즘 순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유럽인들이고 같은 나라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알베르게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음식을 같이 해 먹었다. 또한 이곳이 유럽이다 보니 음식재료 구하기가 비교적 쉬운 것도 그들에게는 장점이었다.
지난 2014년부터 14개월 동안 봉사활동 하면서 에티오피아에서 생활할 때 함께 지내던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가끔 한국에서 출장 오는 한국인이 있으면 초청해서 함께 식사시간을 갖곤 했었는데, 여기 유럽인들도 비슷한 감정인 것 같았다. 타국에서 같은 길을 가고 있으니 공감대도 많고, 동질감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혼자니까 음식을 해 먹기 곤란하다. 그래서 외식을 하거나 슈퍼마켓에서 즉석식품을 사다가 데워먹곤 하는데, 그래도 먹을 만하다. 저녁에도 즉석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복숭아와 요구르트, 오렌지주스와 함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