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18일 (수)
다른 날은 순례자들이 시끄럽게 해서 잠을 설치곤 했었는데, 어제는 나 스스로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쉽게 잠이 오지도 않고, 자다가도 갑자기 다리가 찌릿하면서 경련이 오는 것 같아 잠을 깨기도 했다. 게다가 고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염 알레르기의 여파로 잠들기 전에 숨 쉬기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제도 그 증상이 좀 심하게 왔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Albergue Santa Mariña)는 낮 12시에 문을 연다고 해서 처음엔 6시 반에 알람을 맞춰왔었는데,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에 비가 올 거라고 해서 알람을 다시 6시15분에 맞춰놓고 잤다. 그런데 알람이 울리기 전에 주위가 시끄러웠다. 화장실에 들락거리고 짐을 챙기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도 계속 누워있다가 알람소리에 일어나 곧바로 짐을 챙겼다.
어제 신문지를 몇 번이나 채워뒀던 신발은 아침에도 축축했다. 바닥에 물기는 어느 정도 가신 것 같았지만, 갖고 있던 휴지를 신발바닥에 다시 깔았다.
거실에는 나 말고도 순례자 커플이 짐을 싸고 있었다. 그래도 출발은 또 내가 첫번째였다. 알베르게 밖으로 나가니 비가 오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예보대로라면 오전에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늘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뒤덮고 있어서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니 배낭커버를 씌우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1시간 정도 걸었더니 갈림길이 나오는데, 지도를 보니 어느 길로 가든 다음 마을에서는 카미노와 만나도록 돼있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여자순례자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왼쪽 길로 가고 있었는데, 오른쪽 길로 가야 한다고. 알았다고 하면서 나는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갔다.
오전 9시쯤 돼서 아침에 해 뜨는 광경을 처음으로 봤다. 프랑스길을 걸을 때는 일출광경을 자주 봤었는데, 북쪽길에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 마침 두 그루의 소나무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으니 사진 욕심이 나서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나무에 점점 가까이 갔더니 비 맞은 풀밭에서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오늘 처음으로 돌로 만든 오레오를 봤다.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부터 봐 오던 오레오지만 산티아고를 지나면서부터 돌로 만든 오레오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오늘 그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아마 내일부터는 계속 비슷한 형태의 오레오가 나타날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다른 지방의 오레오들은 크기가 거의 같은데, 돌로 만든 오레오들은 길이가 많이 차이 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 코루냐 주(Provincia de A Coruña)의 카르노타(Carnota)에 있는 오레오는 그 길이가 35m나 된다고 했다.
3시간 정도 걸어서 빌라세리오(Vilaserio) 마을의 바르에 들렀다. 비가 오지 않으니 빵 한조각과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출발! 그런데 그곳부터는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했다. 몇몇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가니 하면서 걸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산타 마리냐(Santa Mariña) 마을에 가까워질 때쯤 여자순례자가 바람을 맞으며 한껏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바퀴 돌기도 하고 바람에 맞서 앞으로 나가기도 했다. 오는 내내 바람이 계속 불었지만, 그녀가 서있는 곳은 유난히 바람이 샜다. 장소가 그런 건지 시간이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산타 마리냐 마을입구에 알베르게 표시가 있었다. 이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2개 있는데, 그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내가 묵을 곳은 아직도 500m쯤 더 가야 했다.
다시 들판을 지나고 큰 길을 건너 가자 길 옆에 오늘 묵을 알베르게가 있었다. 그런데 식당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그런지 알베르게 표시는 작고 식당만 부각돼있었다.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식당에 납품하고 나오는 차량기사에게 물어봤더니 알베르게가 맞다고 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주인이 안내해줬다. 오늘도 역시 첫번째 접수였다. 숙박비는 12유로. 침실은 지하에 있었다. 맘에 드는 침대를 고르고 샤워한 후에 세탁기를 돌렸다. 어제처럼 이틀치를 모두 세탁기에 넣었다. 세탁만 해서 밖에다 널려고 했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예보대로였다. 지금 널면 오늘 중에 마를지 장담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건조기도 돌렸다.
알베르게 주변에는 마을도 없고 당연히 가게도 없어서 오늘 식사는 전부 이 식당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좀전에 접수하며 식사기간을 물어봤더니 점심은 오후 1시부터, 저녁은 7시부터라고 했다.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1시가 되어 1층 식당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식당에서는 menú del día를 주문하려면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를 2~3가지 가운데 고르도록 했는데, 여기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그러면서 뭘 마실 거냐고 해서 커피를 달라고 했다. 그러고 조금 기다렸더니 파스타를 갖다 줬다(에피타이저였다). 이번에 스페인 와서 처음 먹어보는 파스타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돼지고기 볶음을 샐러드와 함께 줬는데, 지금까지 먹었던 것과는 달리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게다가 감자튀김 대신 샐러드와 함께 먹었더니 먹기도 한결 편했다. 메뉴판에는 와인이나 물도 준다고 쓰여 있어서 물을 달라고 했더니 수돗물을 받아다 줬다. 그래도 물맛은 괜찮았다. 가격은 12유로. 저녁식사도 기대된다.
저녁에도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알베르게 주변에 달리 갈 곳도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녁 7시부터 식사할 수 있다고 해서 7시 조금 지난 시간에 식당으로 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있길래 단체손님인줄 알고 작은 테이블에 혼자 앉으려고 했더니, 큰 테이블로 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들도 전부 순례자들이었다.
이 식당에서는 menú del día를 팔긴 해도 선택할 수는 없고 오직 한가지, 주인이 주는 것으로 먹어야 했다. 에피타이저는 우거지국 같은 수프였다. 전에도 갈리시아 수프라고 해서 먹어본 적이 있는 거였다. 간이 적당하고 맛도 좋아 먹을 만했다.
메인 요리는 돼지고기 튀김이었다. 소스가 없는 돈까스 같았다. 거기에 야채를 같이 곁들이니 먹기에 편했다. 밥도 함께 줬는데, 서걱거려서 못 먹겠다. 같은 자리에 앉은 미국 워싱턴주에서 왔다는 순례자가, 한국에서 왔다면서 왜 밥을 먹지 않느냐고 했는데 대답하기 곤란해서 그저 미소만 짓고 말았다.
디저트는 점심 때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니까 저녁에는 요구르트를 먹었다. 다른 순례자들은 대화하느라고 식사시간이 길어져서 나 먼저 일어나 침실로 돌아왔다. 식사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잠자다가 화장실에 가서 창문을 열어봐도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걱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