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20일 (목)
침실에 혼자서만 머물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불을 환하게 켜고 짐을 쌀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빠짐없이 배낭을 꾸려서 알베르게를 나서니 바람은 세차게 불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밤에도 빗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밤새도록 다 내렸나 보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건 얼마 가지 못했다.
어제 묵은 둠부리아의 알베르게 입구에는 각 지역으로 가는 버스시간표가 붙어있었다. 아마도 많은 순례자들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나도 어제 일기예보를 보고, 만약에 오늘 출발할 때 비가 내리면 무시아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출발할 때 비도 안 오고 하늘도 대체로 맑아 보여서 안심하고 길을 나섰던 건데, 몇 십분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른 처마 밑으로 들어가서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서 곧바로 바지가 다 젖어버렸다.
더구나 카미노는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전에 미처 지도를 봐놓지 않아서 어디로 가는지 몰라 포장도로를 무작정 따라갈 수도 없었다. 숲길에 비가 내리니 바닥은 도랑으로 변했다. 그나마 많은 비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핸드폰으로 길을 비추고 가다가 계속 비를 맞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고가도로 밑에서 잠깐 비를 피하며 배낭 속에 있는 후레쉬를 꺼내 비추면서 걸어갔다.
숲길을 빠져나오니 비도 그치고 하늘엔 별들이 한가득 채워졌다. 그믐달도 함께 비추니 이제부터는 맑아지겠구나 하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웬걸! 얼마 후에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그 많던 별들을 다 가리고 달빛마저 없애버렸다. 그리고는 좀전보다 더 많은 비가 내렸다.
이젠 피할 곳도 없으니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다. 너무 산골로 들어왔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2시간 동안 걷다 보니 바르가 나타났다. 그때는 비도 좀 잦아들고 있었다. 얼른 바르로 들어가 커피를 한잔 주문해서 마시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자순례자 2명이 들어왔다. 나는 볼일을 마쳤으니 배낭을 메고 바르를 나왔다. 그때는 비도 어느 정도 그쳐있었다.
잘 됐다! 그렇지만 이내 비는 계속 오락가락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좀전에 바르에 들렀을 때는 괜찮았는데 왜 이러지? 그렇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최소한 1시간 이상 가야 할 거리였다.
배 아픈 걸 억지로 참으며 마을에 도착했지만 바르는 문이 닫혀 있었다. 아마도 폐업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어쩌지? 최대한 참으면서 길을 걸었는데, 어느 순간 한계점에 다다랐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 밖에서 볼일을 본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치 마시멜로처럼 생긴 소먹이 더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비 내리는 게 조금 줄어들긴 했어도 비를 다 맞으면서 급하게 볼일을 마치고 나니까 옷은 많이 젖었지만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여기부터 카미노는 다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도록 나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빨리 가고 싶어서 가운데 포장도로를 택했다. 차들이 꽤 다니는 길이었지만, 이 빗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잠시 후부터 비는 소나기로 변했다. 속옷까지 속속들이 젖은 건 물론이고 신발 바닥에도 물이 한가득이었다. 이제는 모든 걸 받아들이며 비바람을 맞고 무시아를 향해 계속 걸었다.
자동차들은 옆에서 빠르게 지나가고, 좁은 갓길은 도랑으로 변했다. 아무리 젖은 신발이지만 물 속으로 걷고 싶지는 않아서 차도와 갓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걸었다.
잠시 후부터 비는 소나기로 변했다. 속옷까지 속속들이 젖은 건 물론이고 신발 바닥에도 물이 한가득이었다. 이제는 모든 걸 받아들이며 비바람을 맞고 무시아를 향해 계속 걸었다.
무시아 초입에 다다르니 비는 조금 멎었지만 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인터넷에 보면, 공립 알베르게(Albergue de peregrinos de Muxía)에서 카미노 무시아(Camino Muxía)의 순례증명서를 발급해준다는 내용을 본 것 같아서 찾아가려는데 산 위에 있었다. 게다가 그 산으로 가는 길을 지나쳐버렸다. 앞으로 가면 한참 돌아가야 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 산길을 올라갔는데, 비가 와서 좁은 산길은 도랑으로 변해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공립 알베르게는 문이 닫혀있었다. 몇 시에 문을 연다는 안내문도 없었다. 주위를 서성이고 있으니까 옆에서 작업하고 있던 사람이 다른 쪽이 출입구라고 알려줘서 그곳으로 갔더니 마침 직원이 입구 쪽으로 오면서 오후 1시에 문을 연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묵으려는 게 아니라 순례증명서를 발급받으려고 한다니까, 그건 관광안내소(Oficina Turismo)로 가야 한다면서 장소와 시간을 알려줬다.
이제 오늘 묵을 알베르게를 찾아가야 했다. 며칠 전에 이곳의 한 알베르게에 이메일로 예약했었는데,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그 알베르게(Albergue Muxía Mare)를 찾아갔다. 오픈시간보다 1시간 전에 가서인지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도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비를 맞아 몸은 추운데 밖에서 떨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구나 주위에는 들어가서 쉴 만한 바르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알베르게를 검색하다가 오늘 묵은 알베르게(Albergue Arribada)를 찾아 지도를 보면서 그곳으로 갔다. 다행히 문이 열려있었다. 안내문을 보니 오전 9시부터 문을 여는 알베르게였다. 앞서 온 순례자가 먼저 접수하고 내 차례가 됐다.
여권과 크레덴시알을 제시하고 숙박비 15유로를 지불했더니 침대위치와 출입문 패스워드가 적힌 쪽지를 하나 줬다. 1층(우리의 2층)으로 올라갔더니 침대들이 하나씩 커튼으로 가려져있었다. 15유로짜리 알베르게에서 묵어보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수건도 하나씩 비치돼있었다. 2층 침대로 올라가는 계단도 침대와 침대 사이에 따로 마련돼있어서 오르내리기도 편할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어제 입었던 옷까지 세탁하기 위해 세탁기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마침 빈 세탁기가 있어서 옷을 전부 넣고 돌렸다. 바로 옆에 건조지가 있어서 사용하기도 편했다(건조기에 넣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알베르게 주인이 대신 해줬다).
오후가 되니까 비가 그치면서 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제와 비슷한 패턴이었다. 내일도 그러려나! 아무튼, 바닷가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관광안내소가 있어서 그곳에 들어갔더니 앞서 온 사람들이 상담을 받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질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그냥 나오면서 안내문을 봤더니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문 닫는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문을 열려있었지만 근무시간이 아니었던 거였다(바닷가를 구경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오후 3시쯤에는 문이 닫혀있었다).
관광안내소를 지나 계속 가면 바닷가가 나왔다. 리바데오를 지나면서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후 2주 만에 다시 바다를 보게 됐다. 그곳에는, 야고보 성인이 지역주민들을 기독교화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낙담하고 있을 때 성모마리아가 나타났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해서 지었다는 예배당(Santuario de la Virgen de la Barca)이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원래 켈트족의 성지였는데 그들을 어렵게 기독교로 개종시킨 후에 그곳에 예배당을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예배당은 2013년 낙뢰로 인한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후에 보수한 곳이다.
예배당 옆에는 알베르토 바뉴엘로스가 만든 페리다 기념비(Escultura A Ferida de Alberto Bañuelos)가 있고, 그 바로 앞에 ‘km 0.000’ 표지석이 있다. 기념비는, 2002년 유조선이 침몰해 이 해안에 많은 기름을 유출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환경재앙을 기억하고 해변을 청소한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규모는 높이가 11m이고, 무게는 400톤이다.
바닷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거셌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파도도 엄청 높았는데, 세찬 바람까지 부니까 가까이 가면 배가 내리는 것처럼 위에서 물이 떨어졌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지만 인터넷에서 보던 사진처럼 나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핸드폰으로 찍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파도 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는 건 아주 생동력이 있었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관광안내소를 다시 지났지만 문이 잠겨있었다. 그러니까 순례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4시 이후에 다시 가야 했다. 알베르게의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4시에 일어나 관광안내소로 다시 갔더니 바로 순례증명서를 발급해줬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이왕이면 기념으로 받아두는 것 괜찮은 것 같다.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배들이 정박해있는 부두로 나가봤는데, 언제 비가 내릴지 몰라서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오늘 점심에는 바르를 찾아갈까 망설이다가 어떤 메뉴가 있는지 몰라서 마음 편하게 슈퍼마켓으로 가서 파에야를 사다가 데워 먹었다.
저녁에는 낮에 사다 둔 훈제통닭을 먹었는데, 전만큼 먹을 수가 없어서 3분의1은 남겼다. 대신에 과일과 요구르트 등을 먹었다.
알베르게에서 한국의 젊은 순례자를 만났다. 9월16일 생장피드포르를 출발해 프랑스길과 피스테라를 거쳐 무시아까지 걸었고, 내일 산티아고로 가서 하루를 보낸 다음 귀국할 거라고 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더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