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45일째, 무시아에서 피스테라까지

by 이흥재

2022년 10월21일 (금)


오늘은 카미노 걷기 마지막 날이다. 그런데 당초 예정했던 피스테라 등대(Faro de Finisterre)까지 가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전에 다녀오기도 했었고,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에 내일 오전 산티아고로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

피스테라 등대.jpg

아침에 비가 온다면 피스테라까지 버스를 타고 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새벽 6시쯤 알베르게를 나설 때는 바람만 세차고 불고 하늘은 맑아서 일기예보가 틀리길 바라면서 걸었다.


무시아를 벗어나면서부터 카미노를 잃어버렸다. 분명히 표지석을 보면서 걸었는데, 어느 순간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지도를 보니 카미노와는 한참 떨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배낭에서 판초우의를 꺼내 입고 계속 걸었다.


카미노 방향으로 계속 갔더니 함께 만에 카미노를 만날 수 있었다. 오늘처럼 비 오는 어두운 길을 갈 때 지도마저 없으면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다. 어두운 산길에서 방향을 모르면 움직일 수조차 없다. 괜히 아무 쪽으로든 갔다가는 한참 동안 되돌아와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3시간 반쯤 걸어서 리레스(Lires) 마을의 카페에서 첫 휴식을 가졌다. 아침을 겸해 토르티야 한조각과 맥주를 마셨다. 카페 주인에게 여기서 피스테라로 가는 버스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없다고 했다. ‘택시는 있느냐’고까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만약 택시조차 없다고 한다면 걸어갈 힘도 줄어들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이젠 어쩔 수 없이 피스테라까지 걸어가야 한다. 이제 반쯤 온 셈이다.


리레스를 지나면서부터 마주 오는 순례자들을 종종 만났다. 나와는 반대로 피스테라에서 무시아로 가는 순례자들이었다. 그런데,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순례자들은 꽤 무뚝뚝했다. ‘올라!’라고 인사를 해도 대답이 없었다. 유럽인들은 인사하면 ‘부에노스 디아스’나 ‘부엔 카미노’를 외쳐주는데.


그러다가 대만에서 온 여자순례자를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내게 한국사람이냐고 물었는데, 발음이 좀 어눌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국사람이냐고 물었더니 ‘타이완’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말을 할 줄 아냐니까 ‘조금’만 안다고 했다. 이 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상냥한 아시아인이었다.

티이완.jpg

그 후로도 마주 오는 순례자들을 여럿 만났다. 가까이 왔을 때 사진을 찍었더니 포즈를 취해주거나 환하게 웃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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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가 거의 됐을 무렵, 마주 오는 순례자가 오른쪽으로 보라고 했다. 이번 카미노에서 처음 보는 무지겠다. 그 무지개를 시간이 나면서 점점 커지더니 결국 반원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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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12시쯤 두번째로 만난 바르에서 커피와 토르티야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다행히 금새 그쳐서 바르를 나설 때는 햇볕이 났다.


피스테라에 가까워졌는데 카미노는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그렇지만 그 길을 무시하고 계속 포장도로를 따라 직진했다. 걷다 보면 어차피 카미노도 이 도로와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걷는 거리는 비슷할지 몰라고, 오늘도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알베르게에 도착해야 한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 피스테라 초입에 도착해 바닷가 쪽으로 서있는 십자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뒤따라오던 여자순례자 둘이 도로를 건너오더니 바다를 배경으로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이번 카미노에서는 처음으로 찍는 내 사진이었다.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면 표정이나 동작 등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찍어달라고 하지 않았었는데, 그녀들은 아주 잘 찍어줬다. 그녀들에게도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해서 바로 마을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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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베르게를 찾기 위해 지도에서 검색해봤다. 당초에는, 내일 피스테라 등대를 보러 가기 위해 그곳에 가까운 알베르게에 묵으려고 알베르게(Albergue A Pedra Santa)를 예약했었는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지도를 보면서 그 알베르게를 찾아갔는데 마을과 너무 떨어져있는 것 같아서 포기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4년전에도 묵었던 알베르게(Albergue Arasolis)로 갔다. 산티아고로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좀 더 가까운 알베르게를 찾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내일은 9시45분에 산티아고로 출발하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으므로 서두를 것도 없었다.


알베르게로 들어갔더니 주인이 먼저 온 순례자의 접수를 먼저 받고는 이어서 내 접수를 받아줬다. 침대는 이 알베르게에서 하나밖에 없는 단독침대를 줬는데, 2층이 없으니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었다. 주인이 세탁기(3유로)도 돌려주고 널어주기까지 했다. 고마운 마음에 준비해간 선물을 하나 줬더니 아주 좋아했다. 그러면서 며칠 전에 이곳에 묵었던 한국인 순례자가 남겨 놓은, 조가비에 적은 메모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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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마친 후에 세탁물을 주인에게 맡기고 마을구경을 하러 나섰다. 바닷가로 갔더니 식당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 저녁식사 할 식당을 하나 눈여겨 봐뒀다. ‘오늘의 메뉴’가 7시 반부터 시작된다고 하니, 그 시간에 맞춰 가면 될 것이었다.


한참 동안 돌아다니다가 알베르게로 돌아가면서, 무시아에서 피스테라까지의 순례증명서를 받으려고 4년전에 들렀던 관광안내소로 갔더니 문이 잠겨있었다. 그때 마침 그곳에 나와있던 알베르게 주인이, 공립 알베르게로 가면 발급해준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 순례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마을구경 하는 동안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순례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특별히 할 얘기도 없지만, 여럿이 함께 온 사람들에게는 별로 말을 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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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에서 유튜브를 보다가, 낮에 널어놓은 빨래가 얼마나 말랐나 보려고 밖으로 나갔더니 비가 오고 있었다. 그 동안 마른 것까지 다시 젖어버렸다. 비를 맞으며 젖은 빨래를 걷다 보니 입고 있는 옷마저 젖었다. 이제 어떡하나? 빨래대는 여럿을 고정해놓아서 옮길 수 없도록 해놓았다. 어쩔 수 없이 젖은 빨래를 들고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마침 빈 침대가 있어서 말리기 위해 여기저기 널어놓았다(그렇지만 아침까지 마르지 않아서, 다음날까지 말려야 했다).


침대에 앉아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낮에 봐둔 식당으로 비를 맞으며 저녁을 먹으로 나갔다. 입구에는 버젓이 ‘오늘의 메뉴’를 저녁 7시 반부터 판다고 해놓고서, 지금은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럴 수가! 단품을 주문하라고 하는데, 맘에 드는 음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비를 맞으면서 다른 식당을 찾아 다닐 수도 없는 처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아무 음식이나 골랐다.


나온 음식을 보니 전에 먹은 적이 있는 돼지고기 튀김이었다. 늘 그랬지만 이 퍽퍽한 음식을 감자튀김과 함께 먹는다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추워서 맥주 대신 커피를 주문했는데, 이건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그래도 이왕 주문했으니 어쩌겠나! 꾸역꾸역 나온 음식을 먹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다행스럽게도 비가 조금 잦아들어서 알베르게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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