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이흥재

스페인어 ‘카미노(camino)’는 ‘길’을 뜻하는 보통명사이지만, 스페인 북부지방에서는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길’이란 뜻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의 줄임말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다가 길을 잘 모를 때 현지주민들에게 ‘카미노!’라고만 외쳐도 노란 화살표가 표시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여러 곳이 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곳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길과 북쪽길[Routes of Santiago de Compostela: Camino Francés and Routes of Northern Spain]이다.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은 프랑스의 국경도시인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의 800km에 이르는 카미노를 말한다.


그러나,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에서는 100km 이상만 걸으면 순례자 증명서(Compostela)를 발급해 주기 때문에 사리아(Sarria)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다(2017년 26.5%, 생장피드포르 11%). 또한,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사람들이지만(75%), 미국(5.8%)과 브라질(1.7%) 등 북•남미 사람들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카미노에 다녀온 사람이 1명이라도 있는 국가는 세계적으로 160개국에 이른다.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가 제일 많으며(1.7%), 그 다음으로 일본(0.5%)과 중국, 그리고 대만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래서 카미노에서 만나는 유럽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카미노에 왜 그렇게 많이 오는지 의아해 한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카미노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어느 글에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을 최종 목표로 잡고,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카미노 걷기를 소망한다고 했는데, 매우 그럴 듯한 비유다. 카미노는 그만큼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프랑스길에는 걷는 동안 먹고 자고 씻고 빨래할 수 있는 시설들이 거의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물론, 2층 침대가 여러 개 놓인 방에서 남녀 구별없이 자야 하고 옆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침대를 여러 사람들이 쓰다 보니 베드버그(bedbug)란 벌레에 물려 가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와는 무관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카미노에 대해서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3년 전 에티오피아에 있을 때다. 숙소에 있던 TV를 통해 KBS world를 볼 수 있었는데, 거기서 카미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걸 보고서 나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도 카미노에 대한 여행기를 몇 번 읽은 적은 있는데, 그때는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아마도 오랜 외국생활을 통해 해외여행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는지 모르겠다.


에티오피아에서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길에 카미노를 거쳐서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뒤로 미루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서 귀국 후인 2016년부터 카미노에 대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고, 왕복 항공료와 카미노를 걷는 동안 쓸 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문제였다. 다행히 가족들은 이런저런 염려를 하면서도 나의 카미노 행에 동의해 줬고, 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그렇게 1년 반을 준비해서 드디어 올해 9월17일 프랑스 파리로 출발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바욘(Bayonne)을 거쳐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피니스테레(Finisterre)까지 900km 가까운 길을 40일 동안 걷고 10월31일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아프기 시작한 발목은 지금까지도 다 낫지 않았지만, 지금은 언제가 될지 모를 두번째 카미노 행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에는 프랑스 생장드뤼즈(Saint-Jean-de-Luz)에서 스페인 이룬(Irún)을 거쳐 산티아고까지의 북쪽길을 걸어보고 싶다. 이 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프랑스길보다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을 만큼 호기심이 가는 길이다.


카미노 첫날 만났던 한국 순례자 한 분이 “카미노를 왔던 사람들은 꼭 다시 한번 와 보고 싶어 한다”고 하길래, ‘이 힘든 길을 뭣 하러 다시 오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카미노를 무사히 걷고 귀국한 후부터는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래서, 북쪽길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고 지난 40일 동안 썼던 일기도 다시 쓰면서 그때의 기억을 정리하는 중이다.


어제 작은 형님을 만나 “5년 내에 다시 한번 가려고 한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때까지 체력이 괜찮겠냐?”고 하셨다. 다시 가더라도 풀어야 할 숙제가 여럿 있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하나씩 준비하려고 한다.


2018년11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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