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22일 (토요일)
엊저녁에 팜플로나(Pamplona) 외곽에서 잤기 때문에 오늘 걸을 거리가 조금 줄어들어서 평소보다 30분 늦게 아침 6시 반에 알람을 맞춰 놓았다. 게다가 아침식사를 일찍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어제 햄버거를 미리 사다 놓았기 때문에 서두를 게 없었다.
그런데, 아침에 햄버거를 먹으려니 너무 맛이 없다. 따뜻할 때 먹었더라도 별로 맛이 없었을 것 같은데, 다 식은 걸 먹으려니까 먹기가 너무 힘들다. 그래도 아침이라 억지로라도 조금 먹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함께 주문했던 감자튀김은 입에 댈 수도 없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콜라만 다 마셨다.
숙소가 카미노에서 좀 벗어난 곳이라서 아침에 동네주민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길을 물어보니 자신없어 하면서 가르쳐 주는데, 마침 옆에 있던 순례자가 인사를 하면서 바른 길을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됐는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왔으며 이번에는 로그로뇨(Logroño)까지만 걷고, 내년에 다시 와서 부르고스(Burgos)까지, 그리고 그 다음해에 마지막으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따지 걸을 거라고 했다.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얘기하는데도 대충 알아들은 것 같다. 아무래도 카미노에 대한 얘기라서 눈치껏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사람들은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카미노 전 코스를 한꺼번에 걷지 않고 휴가를 내어 시간이 날 때마다 구간을 나눠 여러 번에 걸쳐 걷는 경우가 많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산티아고까지 1,500km 넘게 걷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조금 걷다보니 팜플로나에서 묵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서 꽤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삼삼오오 모여 얘기하면서 걷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은 혼자서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나처럼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1시간쯤 걷다보니 멀리 산등성이에 돌아가는 풍차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정표에는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ón, ‘용서의 언덕’이라고 한다)까지 8.4km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풍차를 만나려면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는 페르돈 고개까지 그만큼 가야 한다는 거다. 아침부터 물집이 신경 쓰이고 발목도 계속 아프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슬라이드 33
오늘도 길가에 있는 산딸기를 하나씩 따 먹으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페르돈 고개에 도착했다. 스페인어 ‘페르돈’은 우리말로 ‘용서’, ‘화해’를 뜻하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1996년 나바라 카미노 친구협회(Amigos del Camino de Santiago en Navarra)가 조각가인 빈센테 갈베테(Vincente Galbete)에게 의뢰해서 설치한 철 조각품 때문에 더 유명한 곳이 된 듯하다. 조각품은 걷거나 말, 당나귀를 타고 순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제 크기로 표현해 놓았는데, 조각품 중 한 곳에는 “별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바람이 지나가는 곳(Donde de cruza del cammino del viento con el de las Estrellas)”이란 문구를 새겨 놓았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조각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나도 생장피드포르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처음 사진을 찍고, 두번째로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매일 힘들게 걷다보니 늘 피곤하고 배가 고프다. 그래서 가능한 한 자주 먹으려고 한다. 오늘도 페르돈 고개를 넘기 전 마을인 사리키에기(Zariquiegui)에서 먹고, 페르돈 고개에 올라와 또 먹었다. 그렇지만, 점심시간이 되니 먹을 곳이 마땅하지 않다. 페르돈 고개를 내려가 만나는 첫 마을인 우테르가(Uterga)는 물론, 다음 마을인 무루사발(Muruzábal)에서도 딱히 먹을 만한 게 없어서 오늘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en euskera y de forma cooficial Gares)까지 가야만 하나 걱정했는데, 바로 전 마을인 오바노스(Obanos)에서 드디어 바(bar)를 찾았다. 얼른 배낭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오믈렛과 맥주를 주문해서 야외에 있는 식탁에 앉아 간단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이제 3km만 더 걸으면 오늘의 목적지다. 앞만 보고 걷는데, 어제 예약해 놓았던 숙소(Jakue)가 바로 눈 앞에 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지도상으로는 골목으로 들어가야 숙소가 있는 거로 나오는데, 어쩌다 보니 지름길이 있었나 보다. 잘 된 일이다. 숙소는 오늘도 2층 침대가 있는 도미토리(dormitory)다. 그나마 1층에서 자게 되어 다행이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세탁기를 직접 작동해서 빨래를 했다. 물론, 코인을 넣어서 작동하는 거였지만. 그래도 처음 쓰는 거라 작동법을 몰랐는데, 마침 옆에 있던 사람이 도와주어서 무사히 세탁을 마칠 수 있었다.
오후에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시내구경을 나갔다. 그런데, 날씨는 따갑고 시내까지는 꽤 멀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 유명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왕비의 다리’란 뜻) 다리는 보고 가야 할 것 같아서다. 이 다리는 물살이 센 아르가 강(Río Arga)을 건너는 순례자들의 안전을 위해 12세기에 산초3세의 부인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마을이름도 유래됐다고 한다.
이 다리는 카미노가 지나가는 곳에 있어서 아침에 봐도 되겠지만, 일찍 출발하면 어두워서 잘 안 보일 수 있다고 해서 꼭 가보고 싶었다.
카미노를 지나다 보면 푸엔테 라 레이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건물들의 벽이 전부 붙어있다. 그러니까 거리 길이만큼 집들도 길다.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샌프란시코(San Francisco)에서도 이런 건물들은 본 적이 있고, 그곳에서는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그렇게 지었다고 했는데, 여기는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한국 젊은이 둘을 만났다. 한번은 페르돈 언덕에서, 또 한 명은 숙소에서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페르돈 언덕에서 만난 여자는 아일랜드에서 1년 반쯤 공부하다가 귀국하는 길에 한달 정도 카미노를 걷는 거라고 했다. 이 여자는 두번째 보는 거였는데, 처음 본 곳은 사리키에기로, 커피를 마시면서 언뜻 보았는데, 한국사람인지 일본사람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아서 지나쳤었고, 페르돈 고개에서 보니 배낭에 태극기가 꽂혀 있어서 곧바로 말을 걸었다. 그 여자도 내가 한국사람인지 잘 몰랐다고 했다. 카미노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다.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들도 이곳에 많이 오니까.
같은 방에 배정되었던 청년은 여러 번 봤었는데, 간단하게 인사만 하다가 오늘에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청년은 젊은 나이에 많은 경험을 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저녁을 숙소에서 주문했는데, 7시20분부터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스페인은 대체적으로 저녁식사 시간이 늦다. 레스토랑은 바를 겸하고 있어서 낮에도 문은 열지만 음식은 별로 팔지 않고, 맥주나 커피를 주로 판다. 심한 경우에는 밤 10시에 저녁을 먹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의 라이프 사이클에 맞춘 거겠지만,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의 시간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러니, 눈치껏 해결하는 수 밖에 없다.
저녁식사는 숙소 옆의 호텔 식당에서 뷔페로 먹었는데, 가격은 다소 비쌌지만(13€), 카미노를 걷는 중에 먹었던 식사 중에서는 최고였다. 음식도 다양하고 맛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