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28일 (금요일), 오전 흐리고 오후 맑음
엊저녁을 먹었던 식당에서 오늘 아침 6시부터 문을 연다고 하기에 일어나자마자 곧장 가서 하몽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해, 어제 사다 놓은 귤과 함께 먹었는데, 샌드위치가 너무 커서 다 못 먹고 남은 건 점심에 먹었다.
오늘은 출발이 아주 좋다. 발바닥 아픈 건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고, 발목도 견딜 만 하다. 열흘쯤 지나니 드디어 적응하는구나! 보름에서 반달로 변해가는 달은 아직 중천에 떠 있고 주위는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볍게 나헤라(Nájera)를 떠났다.
오늘 처음 만나는 마을인 아소프라(Azofra)는,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쳤다. 아, 그런데 다음 마일은 시루에냐(Cirueña)는 10km를 더 가야 한다. 앉아 쉴 만한 곳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비상식량을 챙겨 놓았으니 배가 고프면 어디에서든 내려놓고 먹을 수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발에 모래가 들어갔을 때 신발을 벗어 털어내는 것 말고는 쉬지 않고, 나헤라에서 15km 떨어진 시루에냐의 바에 들어가서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아침에 남겨 놓은 샌드위치와 귤을 먹는 걸로 점심식사를 대신했다. 시루에냐는 신흥도시처럼 새로 지은 주택들이 많고, 스페인에 와서 처음 보는 골프연습장도 있었다.
그런데, 바를 나서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오전 내내 괜찮았다고 생각했던 발이 또 말썽이었다. 발바닥이 아픈 건 참을 만한데, 발목이 점점 아파왔다. 게다가 오늘은 매일 차던 발목보호대도 착용하지 않은 채였다. 어제 빨아 널었는데, 다 마르질 않아서 배낭에 매달고 오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안되겠기에 더 심각해지기 전에 발목보호대를 꺼내 양말 위에 덧 신었다.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까지는 6km가 남았다. 그런데, 힘든 구간은 지금부터다. 길은 어제까지 걷던 자갈길이고 약간의 언덕이 있긴 해도 크게 어려움은 없는 곳이지만, 발이 점점 아파오니 발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쉬지 않고 걷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겠지.
그렇게 아픈 다리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했다. 이곳은 닭에 대한 전설이 있는 곳이다.
중세시대에 독일 청년이 부모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에 나섰다가 이곳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 도착해서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여관집 딸이 청년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서 사랑을 고백했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그 청년은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다. 앙심을 품은 그녀는 청년에게 복수하려고 은잔(銀盞)을 청년의 짐가방에 몰래 넣어놓고 도둑으로 고발했다. 재판소로 끌려간 청년과 그의 부모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청년은 유죄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청년의 부모는 절망에 빠졌지만 산티아고 성인에게 기도를 올리며 순례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들이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는 길에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는 다시 지나가게 되었는데, “산티아고의 자비로 아들이 살아있다”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음성을 들은 부모는 기쁜 마음으로 재판관에게 찾아가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닭고기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재판관은 그들의 말을 듣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 아들이 살아있다면, 당신들이 날 귀찮게 하기 전에 내가 먹으려고 했던 이 암탉과 수탉도 살아 나겠구려.” 그러자, 닭들이 정말로 살아나서 즐겁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설과 전통 때문에 중세 순례자들에게 여행 중 수탉이 우는 소리를 듣는 것을 좋은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지금도 대성당(Catedral de 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는 닭장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관광안내소 유리창에는 닭을 그래픽 해서 붙여 놓았다.
이제는 숙소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당초에 묵으려고 했던 알베르게가 있었지만, 눈에 띄는 알베르게 안내판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 보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 알베르게(Casa de la Cofradía del Santo)에 도착하니 홀도 널찍하고 깨끗하다. 직원이 1층의 윗 침대로 가라고 하기에 아래 침대를 달라고 했더니, 그러면 2층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2층은 3층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1층을 0층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2층의 침대를 배정받았다.
배정받은 침대로 가니 여기저기 한국사람들이 많다. 한 사람은 69세 된 여자였는데, 어제도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지만 대화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60일 일정으로 와서 천천히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또 한 여자는 대구의 어느 수녀원에서 왔다는데, 첫날 생장피드포르에서도 한번 본 여자였다. 그 여자는 얼핏 봐서는 수녀인지 몰랐는데, 일정 때문에 이틀 동안 부르고스(Burgos)까지만 걷고 거기서 버스를 탄 다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사리아(Sarria)까지 가서 다시 걷겠다고 했다.
또 다른 청년들도 있었는데, 아직 자세한 얘기는 나눠보지 못했다. 아무튼, 카미노에는 꽤 많은 한국사람들이 걷고 있다. 열심히 걸어서 모두 목적했던 바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녁에는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이리저리 다니다가 골목에 있는 식당에 코스요리가 12유로라고 쓰인 간판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전채(前菜, primero plato = appetizer)와 메인 요리(segundo plato = main dish) 종류가 너무 많다. 메뉴가 스페인어는 물론 영어로도 쓰여있기는 하지만, 읽어봐도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전채로는 무난해 보이는 하우스 수프(house soup)을 주문했다. 그런데 웬걸, 너무 짜다. 같이 나온 바게트를 찍어 먹는데도 짜다. 그래도 주문한 걸 남길 수는 없어서 다 먹어 치웠다.
메인 요리는 구운 소고기(grilles beef)를 주문했는데, 얇게 썬 소고기를 프라이팬에 익힌 것과 감자튀김이 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고기는 역시 익숙한데다가 맛도 좋았다. 다음은 후식(後食, postre = dessert). 와인(vino)과 물(agua)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했다. 내가 원했던 맥주는 따로 돈을 내야만 한단다. 여기 와서는 시원한 맛에 생맥주를 즐겨 마시다 보니 와인을 별로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물을 선택하고 맥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가격은 1.8유로. 바에서 파는 것보다는 조금 비싼 편이다(보통은 1.5유로 이하). 맥주를 다 마시고 나니 마지막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아이스크림까지 주었다. 그렇게 해서 13.8유로를 주고 색다른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