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틀째, 배낭을 숙소로 보내고 맨 몸으로 아헤스 도착

by 이흥재

2018년 9월30일 (토요일), 맑음


어제는 2층 침대 옆에 있는 싱글 침대에서 자게 되어 잠자리는 편했는데, 하필이면 코 고는 사람이 바로 옆에서 자는 바람에 잠을 많이 설쳤다. 그 사람은 낮에는 수다를 많이 떨더니 밤이 되니까 코까지 골아서 낮에 못다한 수다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서 많이 걸어야 하고(27.5km), 발목도 계속 아프길래 처음으로 배낭을 다음 목적지인 아헤스의 숙소(Albergue el Pajar de Agés)로 부치기로 했다. 카미노에서는 걷는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5유로를 내면 다음 목적지의 알베르게까지 배달해 주는 서비스(우리말로는 ‘경배달 서비스’라고 쓰여 있었다)가 있다. 그래서, 정해진 봉투에 5유로를 넣고 짐을 알베르게(Albergue Municipal el Corro en Belorado)에 맡기고 나왔는데, 나중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확인해 보니 문을 닫은 알베르게로 보낸 거였다. 스마트폰에서 다운 받은 앱에 정보가 업데이트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짐을 다른 알베르게에서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배낭을 먼저 보내면서 휴대전화 하나만 들고 갈까 하다가 그래도 최소한의 짐은 갖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에코백에 몇 가지 물건들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부쳤다. 아침식사는 어제 사다 놓았던 소고기 스튜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고는 곧바로 벨로라도를 출발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날씨가 엄청 춥다. 바람도 꽤 분다. 잠바와 장갑을 꺼내 놨어야 했는데, 이렇게 추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저 참는 수 밖에!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가는데도 계속 시리다. 아니, 손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다. 이러다가 9월에 동상에 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지나는 마을마다 쉬어갈 바도 없다. 하긴 바가 있다고 해도 아직은 오픈 할 시간이 아니다. 8시 반이 지나서 해가 떴는데도 계속 춥다. 날씨가 왜 이러지? 추위는 10시가 지나면서 조금씩 풀렸다.


그러다가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Villafranca Montes de Oca, 11.9km)의 바에 들어가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따뜻한 물에 손을 녹였다. 다른 날이면 이때쯤 맥주 한잔을 마시고 나왔을 테지만, 오늘은 너무 추워서 따뜻한 커피를 대신 마셨다.


앞으로 다음 마을까지는 10km 이상을 더 가야 한다. 그런데, 다행히 숲이 나타났다. 숲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꽤 가파른 고개를 올라야 했지만, 매일 누런 들판만 보다가 오랜만에 푸른 숲을 보게 되니까 발을 계속 아프더라도 마음만은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숲을 만난 걸 기념하기 위해 동영상을 찍었는데, 숲길은 꽤 오래도록 계속 되었다. 나무의 종류도 다양했는데,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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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를 걸으면서 또 하나 부러웠던 건 길이 참 많다는 거였다. 우리가 걷고 있는 카미노는 오로지 순례자용으로만 이용되는 것 같았다. 현지주민들이 쓰기야 하겠지만, 농로(農路)를 제외하면 순례자들만 다니는 것 같다. 하긴, 일년 내내 순례자들이 다닐 테니까 계속 사용하는 도로인 것 맞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여분의 길을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


아픈 발목을 참아가며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23.8km)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다. 시간도 벌써 낮 12시가 훌쩍 넘었다. 보이지 않는 바를 아쉬워하며 마을을 막 벗어나려는 곳에 성당에 붙어있는 알베르게와 바가 보였다. 사람들도 모여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바에 들어가서 먼저 하는 길은 화장실을 찾는 거다. 그런데, 오늘은 먼저 쓰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이제 뭔가 주문해야지. 그런데, 이 바에는 먹을 수 있는 음식도 한 가지 뿐이고 생맥주도 팔지 않았다. 이런!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는 맛에 바에 들르는 건데! 어쩔 수 없이 하나 뿐인 바게트 샌드위치와 맥주 한 병을 사서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파라솔 밑에 탁자가 있었는데, 그늘진 자리는 이미 다 차지하고 햇볕이 비치는 자리만 남아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조금이라도 그늘이 지는 곳으로 옮겨 놓고 빵과 맥주를 먹었다. 샌드위치는 바게트 빵을 세로로 잘라서 치즈와 슬라이스 된 하몽을 넣은 것인데, 조금 딱딱하고 짜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제 3km만 더 가면 오늘의 목적지인 아헤스다. 그런데, 항상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힘들다. 5~6시간 걸어온 피로가 누적되어서다. 그래도 마을에 들어서면 또 다시 힘이 난다. 이제 아침에 부친 배낭을 찾아야겠는데, 내가 짐을 부친 알베르게(Albergue San Rafael)는 없어졌다고 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가까운 곳에 있는 알베르게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다른 알베르게 가면 짐이 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알베르게(Albergue Municipal la Taberna de Agés)로 가 보니 거기에 내 배낭이 있었다. 그런데, 사무실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이 오더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언제까지? 결국 배낭을 메고 문을 연 다른 알베르게(Albergue el Pajar de Agés)로 가서 체크인 한 후에 침대를 배정받았다. 샤워하고 빨래해서 밖에다 너는 것으로 오늘 일과는 끝! 저녁은 6시에 먹을 수 있도록 숙소에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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